항목 ID | GC07400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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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영어공식명칭 | Bongsu(Signal-fire) |
이칭/별칭 | 봉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소희 |
[정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설치된 조선시대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烽)은 밤에 횃불로 서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고, 수(燧)는 낮에 나무에 불을 피워 연기로 연락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봉수조에 의하면 평소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횃불 2개, 적이 경계에 인접하면 횃불 3개, 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면 횃불 4개, 우리나라 군사와 전쟁이 벌어지면 횃불 5개를 들어서 한양에 알렸다. 조선시대 영주 지역에는 죽령봉수(竹嶺烽燧), 망전산봉수(望前山烽燧), 성내산봉수(城內山烽燧), 창팔래산봉수(昌八來山烽燧), 사랑당봉수(沙郞堂烽燧)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봉수의 종류]
봉수대는 30리 간격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설치하였다. 우리나라 봉수는 당시 수도였던 한양의 남산까지 도달하도록 크게 5개의 직봉(直烽) 노선이 있었다. 영주 지역은 경상도 동래에서 언양·경주·의성·안동·예안·영천·봉화·풍기·단양·용인·한양 남산으로 이어지는 제2선에 해당하는데, 이 노선의 직봉은 40개, 간봉은 103개였다.
[영주 지역 봉수의 변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순흥도호부 편에는 죽령산(竹嶺山)에 봉수가 있었으며, 동쪽으로 기천현 망전산(望前山)에 이르고, 북쪽으로 단양의 화산(禾山)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영천군 편에는 소이산(所伊山)에 봉수가 있는데, 동쪽으로 예안 녹전산(祿轉山), 서쪽으로는 기천 망전산에 이르렀으며, 기천현 편에는 현의 남쪽에 망전산봉수가 있어 동쪽으로 영천 소산(所山)[소이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순흥 죽령산에 응했다고 한다. 즉, 15세기 전반 영주 지역에는 순흥도호부의 죽령산봉수, 영천군의 소이산봉수, 기천현[1450년 풍기군으로 개편]의 망전산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천군 편에는 기존의 소이산봉수 대신 성내산봉수가 나타나는데, 동쪽으로 안동부 내성현 당북산봉수(堂北山烽燧)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풍기군 망전산봉수에 응했다고 하여, 15세기 후반 이후 봉수의 위치가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풍기군 편에는 죽령봉수와 망전산봉수가 확인된다. 망전산봉수는 순흥도호부 혁파 후 풍기군 관할로 이속되었다.
이후 영주 지역에는 봉수 2개소가 더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천군 편에는 성내산봉수와 더불어 창팔래산봉수가 확인된다. 지금의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에 있는 창팔래산봉수는 동쪽으로 예안 녹전산, 북쪽으로 봉화 용점산(龍岾山)과 응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849년(헌종 15) 편찬된 『재향지(梓鄕誌)』에 따르면 순흥도호부의 봉수로 사랑당봉수가 새롭게 나타난다. 사랑당봉수는 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에 위치하는데, 동쪽으로는 안동 내성에 응했고 서쪽으로는 영천 상현(商峴)에 응했다고 한다. 사랑당봉수는 임진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 안집사 김륵(金玏)의 건의로 새롭게 설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