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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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榮州靑年同盟 |
영어공식명칭 | Yeongju Youth Leagu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있었던 청년 단체 연합체.
[개설]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은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 청년동맹 결정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통합되어 1927년 11월 24일 결성된 청년운동 조직이다. 영주청년동맹은 창립 후 지부 설치 활동을 통해 영주 청년운동의 통일적 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운동 차원에서 만들어진 신간회 영주지회와 연대해 영주를 비롯한 전국 차원에서 제기되는 정치·사회·경제 등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체가 되었다.
[설립 목적]
영주청년동맹의 설립 목적은 전 조선 청년 대중의 정치·경제·민족적 권리의 획득에 있다.
[변천]
1927년 11월 24일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 청년동맹 결정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통합되어 영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영주청년회관에서 열린 창립대회는 1927년 11월 24일 오전 11시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일제 관헌의 탄압과 방해로 인해 오후에서야 진행되어 17시 30분에 마쳤다. 영주청년동맹 창립대회에 임석한 경찰은 풍기청년회의 출신 영주청년동맹 회원 중 황순일·이용균 등 두 사람을 제외한 20명 모두를 퇴장시키고, 황순일·이용균 두 사람에게도 발언권을 주지 않으며 대회를 탄압하였다.
영주청년동맹은 창립 다음 날인 1927년 11월 25일 제1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동맹의 운영 방침, 당면 문제, 교양 문제 등에 대해 토의하고,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집행위원장에 김복영, 서기에 송홍국을 선임하고, 김익영·김택·강진원·신수현·이용균·장두영·김희락 등 7명의 상무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영주청년동맹은 창립 후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와 조선청년총동맹의 해소운동이 벌어지면서 조직 체계는 점차 약화되었다. 1931년 6월 무렵까지 존립이 확인되나, 그 이후 어느 시기에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주청년동맹은 서무부·재무부·선전교양부·출판집부[연락조직부]·조사연구부[교육연구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부 설치 활동을 통해 통일적 청년운동 조직을 완성해 나갔는데, 그 결과 기존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는 해체 후 영주청년동맹의 지부로 전환되었고, 안정·평은·이산·순흥·단산·장수 등 7개 지부를 두게 되었다.
영주청년동맹은 신간회 운동을 지원하면서도 신간회와 연대해 제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체가 되어 민족운동의 고양에 이바지하였다. 또 영주청년동맹은 순회강연 및 순회문고 설치, 무산 아동 교육, 신문 발행 등을 통해 교육과 언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나아가 군내 민중 생활 정황 조사를 통해 민중 생활의 현실 파악하고, 국제무산청년데이 등 각종 기념일 행사 등을 통해 활동하였다. 1929년에 영주청년동맹은 영주 차원에서 한해 기근민 구제사업 활동을 펼치고, 순흥공립보통학교 교사 화재에 따른 향후 대책 수립에 참여하는 등 지역 사회 관심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 순흥청년회의 관제 성향의 문제를 둘러싸고 지역 사회에 논란이 빚어질 때, 순흥청년회 해체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전국적 차원에서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하여 전국화되는 것에 고무되어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의 부당성과 일제에 저항을 촉구하는 격문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8년 이후 영주경찰서는 영주청년동맹와 영주청년동맹 지부의 각종 행사에 대한 금지 조치로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이 되자 영주청년동맹원에 대한 일제 관헌의 체포, 구금, 석방이 계속되면서 활동이 크게 제약받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주청년동맹은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 청년동맹 결성 방침에 따라 창립된 이래 일제강점기 청년운동의 확대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신간회 운동이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