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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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大里地區戰鬪 |
영어공식명칭 | Namdae-ri Battle |
이칭/별칭 | 남대리 전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1년 10월 14일 - 남대리지구 전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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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1년 10월 19일 - 남대리지구 전투 종료 |
발생|시작 장소 | 남대리지구 전투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
종결 장소 | 남대리지구 전투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국군 제3군단|인민군 제9사단|인민군 제31사단 |
[정의]
1951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한국군과 북한군이 영주 부석면 남대리 일대에서 벌인 전투.
[개설]
남대리지구 전투는 6·25전쟁 중인 1951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과 인민군 제9사단 및 제31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남대리 일대는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의 분기점으로 인근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이었다.
[역사적 배경]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면서, 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은 함경도 지구의 군대를 작전상 후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후퇴’ 이후, 인민군 제2군단이 원주-제천-단양으로 남하하는 가운데, 영주와 안동 일원에서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인민군 빨치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인민군은 국군 제3군단이 작전을 펼치던 영주·봉화·춘양 지역을 점령하기 위하여, 인민군 제9사단은 강원도 영월 남동쪽 옥동리, 인민군 제31사단은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경과]
1951년 1월 14일 국군 제3군단 제3사단은 「작전명령 제5호」에 의거하여 봉화군 물야면에 집결하였다.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는 봉화군 법전면을 출발해 지금의 안동시 녹전면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전방지휘소를 녹전에 설치하고, 제1대대를 미사리어구[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일대]에서 명생동[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간, 제3대대는 명생동에서 어래산 간 선상에 배치되었다.
1951년 1월 15일 국군 제22연대가 주실령[지금의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을 공격하면서 남대리지구 전투가 시작되었다. 남대리지구 전투 초기 인민군은 박달령[지금의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국군에게 타격을 입은 후 서북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1951년 1월 16일 국군은 인민군을 격퇴하였으나, 선달산·마구령·오록리[지금 봉화군] 등은 남대리지구의 인민군에게 타격을 입었다. 반면, 제23연대 제1대대는 미사리어구와 명생동 간 선상에서 병력 및 탄약 부족으로 고전을 겪어야만 했다.
1951년 1월 17일 제3사단 제18연대는 인민군 제31사단의 거점인 남대리를 탈환하고, 인민군과 대치하였다. 1951년 1월 18일 제18연대는 남대리를 거점으로 주변의 인민군을 압박해 나갔으며, 제23연대는 인민군을 곡구[지금의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방면으로 밀어내었다. 1951년 1월 19일 제3사단 제18연대는 남대리전투에서 인민군 제31사단을 격파하고 의풍리[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까지 북상하였으며, 여기서 작전 임무를 제23연대와 제5사단 제27연대에 인계하고 주력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결과]
남대리지구 전투의 승리는 1951년 1월 17일에 벌인 전투가 결정적이었다. 전투 결과 국군은 인민군 1,462명을 사살하고, 67명의 포로를 잡았다.
[의의와 평가]
남대리지구 전투의 승리로 남대리 일대는 국군이 점령하였으며, 인민군은 영주에서 서북 방면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로써 영주는 국군의 작전 아래 인민군 비점령 지역으로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