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82 |
---|---|
한자 | 郭𡺽 |
영어공식명칭 | Kwak Jin |
이칭/별칭 | 정보(靜甫),단곡(丹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감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68년 - 곽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621년 - 곽진 이이첨에 대한 탄핵 상소 개진 |
몰년 시기/일시 | 1633년 - 곽진 사망 |
출생지 | 곽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
거주|이주지 | 곽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
사당|배향지 | 백고리사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현풍(玄風)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학자.
[개설]
곽진(郭𡺽)[1568~1633]은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에서 곽재우(郭再祐)[1552~1617]와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곽진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정보(靜甫), 호는 단곡(丹谷)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곽맹원(郭孟元), 할아버지는 판관을 역임한 곽자보(郭子保), 아버지는 생원 곽한(郭瀚)이다.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참봉인 황언량(黃彦良)의 딸이다. 부인은 장수희(張壽禧)[1516~1586]의 딸 인동장씨(仁同張氏)로 슬하에 아들 곽현(郭玹)과 곽영(郭瓔)[?~1618]을 두었다.
[활동 사항]
곽진은 4살에 글을 배웠고 5, 6세 때 몸가짐이 의젓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한다. 성장 후에도 학문에 정진하여 여러 유서(儒書)를 두루 섭렵했으며, 의학과 천문, 지리, 병서 등에도 통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가족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초유문(招諭文)을 보게 되고, 둘째 형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다. 전란 중에 양친의 상(喪)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상을 마쳤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소백산 아래의 풍기군 단곡(丹谷)[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둘째 아들인 곽영이 이이첨(李爾瞻)[1560~1623]과 허균(許筠)[1569~1618]을 주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옥사하자, 1621년 자신도 이이첨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썼다. 1633년(인조 11) 65세의 일기로 자신이 지은 은구당(隱求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곽진의 문집으로 6권 3책의 『단곡집(丹谷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둘째 아들 곽영의 문집인 『우주암집(宇宙菴集)』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묘소]
곽진의 묘소는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단곡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곽진은 1786년(정조 10) 풍기 지역 사림의 공론으로 백고리사(白皐里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