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383 |
---|---|
한자 | 靑銅器時代 |
영어음역 | Cheongdonggi Sidae |
영어의미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하문식 |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청동기로 도구를 만들어 쓰던 시대.
[개설]
청동기시대의 문화 분포 범위는 대체로 청동기의 표지 유물인 동검을 기준으로 하며, 동검의 모습이 중국의 옛 악기인 비파를 닮은 비파형 동검이 많이 찾아지는 요령 지역까지를 포함한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기원전 13세기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 시기의 경작지는 집터가 대부분 낮은 구릉 지대에 있었던 점에서 논농사와 밭농사가 함께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것은 볍씨와 조·수수·기장 등의 잡곡이 한꺼번에 출토되는 것으로도 짐작된다. 또한 곡물과 함께 반달돌칼·갈판·보습·괭이 등의 농기구가 찾아져 당시의 농경 기술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집은 움집도 있지만 반지상 가옥으로 발전하는 모습의 집터도 찾아지고 있다. 집터의 평면 생김새는 네모꼴과 둥근꼴로 나뉘어지며, 둥근꼴의 움집은 집안 가운데에 긴 타원형으로 조금 판 구덩이가 있다. 집은 대부분 한 곳에 10~100여 채가 모여 취락을 이루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움무덤·독무덤 등 상당히 여러 가지가 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자연적인 여러 현상을 극복해 가면서 살림을 꾸렸기 때문에 풍요와 관련되는 자연 대상물에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특히 이런 믿음은 당시 사람들이 예술 행위로 표출하였던 것 같다. 청동기시대의 예술은 바위그림·조소품·토기나 청동기에 새겨진 무늬 등이 있다. 용인 지역은 구릉성 산지가 폭넓게 발달해 있어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분포한다.
[집터]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최근 공장 부지 개발과 택지 조성 사업에 따른 구제 발굴에서 조사된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와 수지구 죽전동 대덕골 유적이 있다. 이들 유적의 집터가 자리한 곳은 모두 구릉의 꼭대기이며 긴 방향은 등고선과 나란한 모습이다. 평면 생김새는 네모꼴이면서 너비가 좁고 길이가 긴 가는 네모꼴도 있어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집터도 있다.
집터의 바닥은 다른 지역에 많이 찾아지고 있는 것처럼 찰흙을 깔거나 다진 것이 아니고 풍화 암반층을 그대로 이용한 맨바닥이다. 집안에서는 화덕 자리가 찾아졌는데 대덕골 2호와 3호에서는 1기가 있었지만 봉명리와 대덕골 1호에서는 2기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화덕 자리는 어떤 특별한 시설을 한 것이 아니고 맨땅을 움푹하게 파거나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집터에서 찾아진 유물은 토기와 석기 등 당시의 살림살이 연모가 대부분이다. 봉명리 집터에서는 이른 시기의 팽이형 토기 3점과 반달돌칼·화살촉·돌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고 대덕골 3호에서는 구멍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반달돌칼·숫돌 등이 찾아졌다.
[고인돌]
용인 지역에서 조사된 고인돌 유적은 12곳에서 18기가 조사되었으며 현재 15기가 남아 있다. 이들 고인돌은 지금까지 간단한 지표 조사만 실시되었기 때문에 외형적인 특징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지역의 고인돌 입지 조건을 보면 대부분 작은 물줄기 근처의 평지나 그 주변의 구릉 지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드물게는 낮은 야산의 산 능선을 따라 자리하는 경우도 있다.
산 능선에 분포하는 고인돌로 백암면 근삼리 유적이 있다, 이 고인돌은 마을 사람들이 칠성바위라고 부르며, 산 능선을 따라 7기의 고인돌이 자리한다. 그리고 양지면 주북리 고인돌은 바로 옆에 경안천의 샛강인 주북천이 흐르며 얕은 구릉 지대인 이곳을 숲원이·배터골·배모루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인돌 유적이 물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용인 지역의 고인돌 형식은 주변 지역보다 탁자식이 많이 조사된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특히 탁자식 고인돌의 외형적인 특징은 다른 지역보다 굄돌의 높이가 상당히 낮고 덮개돌의 두께는 두터워 전체적으로 묵직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고인돌의 덮개돌로 이용된 재질은 유적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이나 화강암질 편마암 계통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고인돌의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을 고려한 하나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한편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갈아서 판 것과 쪼은 다음 갈아서 만든 구멍이 조사되어 주목된다. 이런 고인돌은 원삼면 안곡과 맹리 유적에서 찾아졌는데 맹리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지름이 3~17㎝, 깊이가 1~7㎝ 되는 크고 작은 27개의 구멍이 조사되어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편에 속한다.
이것의 의미에 관하여는 덮개돌을 떼어내기 위한 것과 의식의 기능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최근까지도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용인 지역의 이러한 구멍은 그 위치나 만든 수법으로 보아 채석보다는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구멍의 정확한 기능이나 의미에 대하여는 다른 지역의 관련 자료와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큰돌문화]
큰돌에 대한 숭배의 표현으로 상하리 고인돌은 위하는 행위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1기의 탁자식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탁자식 고인돌 2기가 축조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고인돌을 ‘할아버지 지석(상지석)’과 ‘할미 지석(하지석)’이라고 불러 왔다.
그런데 이 고인돌에는 평안도 지역의 고인돌에 전하여지는 마고할미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 내용은 이곳을 다스리기 위하여 고인돌을 세웠으며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다가 마지막에는 이곳에 살았다는 것이다.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큰돌문화의 한 종류이며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용인 지역에는 경기 지역의 다른 곳보다 선돌 유적이 많이 있다.
위치한 곳의 입지 조건을 보면 일정하게 정하여진 것이 아니고 주변의 지세가 고려되어 논둑이나 밭둑 그리고 야산 골짜기의 입구 등지에 자리하고 있다. 선돌을 세운 목적이나 기능은 농경에 대한 풍요, 경계와 숭배의 기능이 섞여 있는데 이것은 입지 조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창리 선돌은 민간 신앙의 대표적인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쓰러지면 곧바로 마을에 재앙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어 신성시하고 있다.
[유물]
용인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유물 가운데에는 봉명리 집터에서 찾아진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가 주목된다. 이 토기는 용인 지역 청동기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며, 경기 이남의 평택·안성·천안 지역에서 찾아지고 있는 토기와 비교된다.
또한 기흥구 구성동 연원마을,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양지면 정수리·백암면 백암리·원삼면 두창리, 기흥구 고매동 등지에서 돌도끼가 찾아진 것을 비롯하여 남동 옥현마을과 임진산성에서는 반달돌칼이 출토되었다. 간돌검은 남동 옥현마을과 남사면 창리, 이동읍 덕성리, 포곡읍 유운리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비파형 동검의 전통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한국식 동검인 세형동검의 거푸집이 모현읍 초부리에서 발견된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용인 지역에서 직접 동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푸집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당시에 수준 높은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존재하였으며 용인 지역이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