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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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術 |
영어음역 | Misul |
영어의미역 | Fine Ar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열 |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시각 예술 행위 및 그 결과물.
[개설]
용인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주민이 살아오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미술 문화가 전개되었다. 이는 남겨진 유물이나 문헌 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용인의 경우 통일신라시대까지는 미술 활동의 흔적이 드물지만, 고려시대부터는 불교 미술이나 공예 면에서 중요한 자취들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들어 용인이 사대부들의 세거지와 음택지로 선호되면서 미술 분야에도 많은 성과들이 있었다. 서화 방면에서는 용인 지역에 연고가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며 특히 소당 이재관과 같은 유명 화가가 출생하였다. 그리고 유명인의 묘소가 많아 금석문과 석조 미술의 중요한 자료들이 산재해 있다.
[고대]
삼국시대 이전의 분묘나 주거지 등의 유적들은 발견되지만 미술 분야와 관련된 특별한 유물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금속공예사적으로 볼 때,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출토의 세형동검과 용범이 주목받을 만하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용인 등 경기 지역은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기 때문에 남겨진 문화 유산이 많지 않고 불교 관련 석조 미술품들만 몇 가지 남아 있다.
그 중 처인구 이동읍의 문화재자료 제43호 어비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면서 1층 탑신부에 별석(別石)이 가해진 희귀한 예로 주목받고 있다. 어비리 석등은 경기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으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로는 박곡사지 석불입상, 천리 적동저수지 입구의 석조여래입상, 공세리 탑안 부락의 석조여래좌상, 가실리 백련암 석조여래좌상 등이 이 시기 작품으로 거론되고 있다. 1984년에는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서 높이 11.3㎝짜리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된 바 있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를 굽던 가마가 수지구 성복동에서 조사되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가 되면 수도 개경과 거리가 가까워져 미술 분야에서 그 흔적을 많이 남겼다. 대부분 불교 관련 석조 미술품들이다. 석불로는 문화재자료 제62호인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이 주목되는데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고려적인 특징을 보이는 고려 초기의 주요한 석불로 비정되고 있다.
문화재자료 제44호인 미평리 약사여래입상은 높이가 4m에 달하는 거대한 석불로 미륵불로도 불린다.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문수산 마애보살상은 용인 유일의 마애불상으로 높이 3.2m의 바위를 다듬어 보살입상 2구를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새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석탑으로는 고려 초기의 마북리 석탑과 중기의 공세리 오층석탑[문화재자료 제42호] 그리고 고려 말기의 두창리 삼층석탑[향토유적 제15호] 등이 있다. 가창리 부도[향토유적 제19호]는 석종형(石鐘形)이지만 고려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지구 신봉동에 있는 보물 제9호 서봉사지현오국사탑비는 용인의 대표적인 불교 미술품으로 금석문의 자료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 1967년에 지금의 수지구 풍덕천동에서 고려시대인 1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범종과 반자가 발견되어 국립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공예 면에서는 초기의 고려백자를 생산한 요지로 유명한 사적 제329호 서리 중덕요지와 향토유적 제45호인 상반요지가 있으며 11~12세기로 추정되는 보정리 청자 가마와 죽전동 도기 가마들도 경기도에서 드물게 보는 귀한 유적들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용인은 한양에 인접한 관계로 당시 사대부들의 세거지와 장지로 많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유명 인사들과 관련된 서화 방면이나 금석문, 분묘 관련 석조미술 분야 등에 많은 성과를 남기고 있다. 기타 가마 터들도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용인 출신이나 이곳에 거주했다고 알려진 서화가들로서는 이담(李湛)[1510~1575], 오달제(吳達濟)[1609~1637], 남구만(南九萬)[1629~1711], 이유신(李維新), 이재관(李在寬)[1783~1837], 남계우(南啓于)[1811~1888] 등이 있다.
특히 소당(小塘) 이재관은 조선 후기 화단에서 화명을 크게 떨친 직업 화가로 지금의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서 출생하였다. 나비 그림으로 유명한 사대부 화가인 남계우는 처인구 남사면 창리에 묘소가 있다.
서예가로는 이숭의(李崇義)[1575~?], 남구만, 이의병(李宜炳)[1683~?], 이의중(李宜中)[조선 후기] 등이 알려져 있다. 서예사의 중요 자료인 금석문으로는 석봉 한호가 쓴 「허엽신도비명」(1582년), 김수항이 액서를 쓰고 김수증이 전서로 비명을 쓴 「정몽주신도비명」(1699)이 서예사에 남을 작품이다.
이 밖에 이산해가 쓴 「조광조신도비명」(1585), 송준길이 쓴 「오윤겸묘갈명」(1647), 조윤형이 쓴 「이누묘표명」(1764), 「이필중묘표명」(1764), 「송욱신도비명」(1791) 등이 있다.
한편 용인 지역에는 조선시대 석조 조각품으로 대표되는 문인석, 무인석들도 도처에 널려 있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사대부 무덤으로 기흥구 공세동에 있는 죽정 최유경 묘역 등이 손꼽히고 있다.
용인 지역에 전하는 회화 자료로 중요한 것은 용인의 사대부 문화가 남긴 초상화들이다. 중요한 초상화들이 각 문중에 많이 남아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진재해(秦再奚)가 그린 유수영정(柳綬影幀)[1726, 보물 제1176호]과 작자 미상의 오명항영정(吳命恒影幀)[18세기 초, 보물 제1177호]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불화로 장경사(長庚寺)의 산신탱(1897) 외에 몇 점이 전하고 있다. 이 외에도 용인 지역은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계속적으로 도자기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특히 인근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그 영향으로 용인 도처에 조선시대 전 기간의 가마 터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도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현상이다.
[현대]
현대에 들어서도 용인에서는 많은 걸출한 미술가들이 배출되었다. 김자경 오페라단을 이끌었던 김자경의 남편이자 1945년에 한국 최초로 미술학과를 만든 서양화가 심형구가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사람이며, 현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 장욱진이 작업을 했던 곳도 기흥구 마북동이다. 국립묘지 현충탑 등 많은 기념 조형물을 건립한 이일영도 용인 출신이다.
단체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1998년 용인예총의 출범을 계기로 용인의 예술계가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미술계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미술계 인사들은 1989년 용인미술협회를 창립하여 용인문화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97년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용인지부를 탄생시켰다.
이어 문인협회와 국악협회가 창립되고 이를 토대로 용인예총이 창립된 것이다. 또 1998년 용인사진협회와 한국서가협회 용인지부 등이 창립되어 미술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1년에는 용인 지역 순수 아마추어 화가들의 모임인 용인그림사랑모임이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