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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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傳統家屋 |
영어음역 | Jeontong Gaok |
영어의미역 | Traditional Hous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집필자 | 정연학 |
[정의]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전통적인 형태의 가옥.
[개설]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용인은 한양의 남쪽 100리 안에 위치하는 남교(南郊)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에도 “조사농장 기내거다(朝士農莊 畿內居多)”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한양의 명문사족들이 농장과 별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거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양에 버금가는 주거 문화가 발달 할 수 있었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그리고 새마을 운동과 같은 내·외환의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가옥이 많이 남아있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당시의 전통가옥의 모습은 사라졌고, 17~8세기를 지나면서 복구 사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로 인해 용인에 현존하는 전통가옥의 형태와 구조는 그 당시에 성립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목격되는 용인의 전통가옥들은 거의 조선 후기의 건축물과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며, 이 가옥들의 조형 양식도 물론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지리적 배경]
전통가옥은 위치하는 곳의 자연 조건에 따라 건축재 규모·형태·구조·좌향 등이 달라진다. 용인은 남북 방향의 산지들 사이로 곡저평야가 띠 모양으로 발달하였고 백암분지와 진위천 유역만이 북쪽으로 높은 산지를 등지고 놓여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취락 및 가옥의 입지에 적잖은 영향을 끼쳐왔다.
용인에는 600m이상의 높은 산은 별로 없으나 300~500m의 산지들이 뚜렷한 맥세(脈勢)를 유지하며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급경사를 이룬 산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용인의 산지들은 말단부에 기복이 원만한 구릉을 형성하고 있어 취락 발달에 좋은 조건을 제공한다.
용인의 연평균 강수량은 1300㎜를 약간 상회하여 수원, 평택, 안성 등 인근 시, 군에 비해 100㎜정도 많은 편인데, 이는 용인 일대에 분포하는 500m급 산지에 비구름이 차단되어 내리는 지형성 강우와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용인은 경기도 내에서 가장 용수(用水)의 획득이 용이하면서도 수해가 적은 가거지로 뽑혀 왔다. 경기도의 탁월풍은 서북풍이며 용인도 경기도 내의 타지방과 차이가 없다. 12월 초부터 이듬해 3월까지 한랭 건조한 서북풍이 불기 때문에 전통가옥들은 이 바람을 고려하여 조영되었다.
지형적으로 산지를 끼고 있는 백암분지와 진위천 유역을 제외하면 거의 전 지역이 서북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전통 마을 대부분은 서북풍에 노출되는 경안천, 탄천의 평야면보다 동서 방향으로 열린 하천의 소지류 계곡 내에 입지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마을의 고가(古家)들은 남향, 동남향, 서남향으로 들어앉은 배산임수형(背山臨水型)이 많았다.
[변천]
전통가옥의 형태적인 변화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 첫째는 외형적으로 처음 만들어졌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가옥, 둘째는 그대로의 뼈대만을 또는 일부만을 유지하고 건축 자재를 비롯해서 생활 공간 내부를 현대적인 것으로 바꾼 가옥, 셋째는 원래의 가옥은 그대로 두면서 부속 건물을 처음부터 현대식으로 새로 건축해 사용하는 가옥이 그것이다.
첫째 유형은 문화재 등으로 지정된 가옥에 해당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민가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둘째 유형과 셋째 유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생활상의 필요에 의한 변용을 보여주는 주생활의 단적인 모습이다.
셋째 유형은 ‘첫째 유형+현대식 부속 건물’ 결합형과 ‘둘째 유형+현대식 부속 건물’ 결합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개가 후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농촌 가옥에서 중농(中農) 또는 소농(小農)이 거주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가옥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활상과 가옥의 형태적인 변화상이 어떻게 맞물려져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민가들의 외관이 초가에서 기와나 함석지붕으로 바뀌게 되었고, 생활 수준이 향상된 1990년 이후부터는 도시형 건축이 들어서고 생활 방식도 도시민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보통 안채의 변화는 건축 자재의 변화가 일반적이다. 보통 전통가옥은 나무나 흙벽으로 이루어졌는데 새마을운동 이후부터 시멘트를 재료로 한 벽체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편, 안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인 부엌은 옛날 아궁이가 있었던 공간에서 현대식의 주방으로 바뀌었는데, 과거 안방과 부엌이 서로 구분되는 공간으로서 사잇문 하나로 연결되었지만 현재는 그 사잇문이 더 넓어지거나 문 자체가 없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행랑채 또는 사랑채는 용도가 상당히 변하였다. 그 중에 방 하나 정도를 침식(寢食)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뿐 나머지 부분은 방치해 두거나 용도 변경을 하여 창고로 활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기존의 가옥 공간을 변형하여 이용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이용 공간을 신축한 것이다. 목욕실(세면장)과 세탁실 그리고 보일러실과 같은 공간이 그것에 속한다.
목욕실과 세탁실은 물을 이용해 사람이 직접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는 원시 형태에서 산업화의 결과물인 기계를 이용함으로써 그것에 걸맞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면서 부엌 바로 옆에 부속건물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농촌에서도 난방 원료를 기름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일반화되면서 생활 공간은 아니지만 집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설비 공간으로서 보일러실을 별도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형태]
용인을 대표하는 원래 가옥형은 ㄱ자형[곱패집]이다. 그러나 ㅡ자형, 二자형, ㄷ자형, ㅁ자형, 즉 ㄱ자형과 ㄴ자형이 마주보는 맞곱패형, ㄱ자형 안채에 一자형 부속채를 배치하는 튼 ㄷ자형 앞에 一자형 부속채를 두는 튼 ㅁ자형 등 남부지방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가옥들이 용인에는 분포한다.
부가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용인시의 가옥 구조상의 구분은 북서부 지역과 남부 지역 간에 약간의 변별적 차이를 보이는 양상으로 조사되었다. 우선 북서부 지역은 용인시 중심부, 기흥구, 수지구, 처인구 모현읍, 이동읍, 포곡면 등을 아우르는 경안천, 탄천, 오산천 유역이고, 남부 지역은 청미천 유역의 처인구 원삼면, 백암면 일대와 진위천 유역 등이다. 한편 이들 두 지역 사이의 양지면은 점이지대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용인 북부의 가옥은 ㄱ자형(또는 왼 ㄱ자형) 안채에 ㄴ자형(또는 왼 ㄴ자형) 사랑채로 구성된 맞곱패집이 가장 많으며, ㄱ자형에 一자형 부속채를 가진 튼 ㄷ자형 가옥이나 ㄱ자형 살림집 한 채만 있는 것들도 있다. 처인구 원삼면, 백암면, 남사면 일대에도 ㄱ자형 안채를 가진 가옥들이 가장 탁월하게 분포한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一자형, 二자형 가옥이 적지 않으며 맞곱패집 보다는 ㄱ자형 안채에 一자형 부속채를 가진 집들이 더 많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경기도 지방의 가옥 발달은 건축재의 공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용인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시대에 남한강과 북한강 상류 지방과 태안반도 일대는 주요 목재 산지였기 때문에 경기도 지방은 한강 수로와 경기만 해로를 통하여 목재를 공급받을 수 있었으므로 중상류형 가옥을 건축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경기도 일대에는 상업적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부유한 농민과 상인의 수가 증가했으며, 이들은 신분 상승의 목적으로 상류층 가옥을 모방한 가옥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타지역이 ㄱ자형 가옥이 중상류층의 가옥으로 인식되는 것과는 달리 일반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