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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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友亭記 |
영어음역 | Hyoujeonggi |
영어의미역 | The Chronicle of Hyoujeong Pavili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순석 |
성격 |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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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서거정(徐居正) |
창작연도/발표연도 | 1478년(성종 9) |
[정의]
조선 전기 서거정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있던 효우정의 내력을 적은 기문.
[개설]
『속동문선(續東文選)』권13에 전하는 작품으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있던 효우정(孝友亭)의 내력을 기록한 기문(記文)이다. 김중호(金仲浩)의 부탁으로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지었다.
[내용]
고려 말 학자 이석지(李釋之)의 손자인 이종검(李宗儉)·이종겸(李宗謙)이 조부의 뒤를 이어 남곡에서 살았는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마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마을 부로(父老)를 위하여 효우정(孝友亭)을 지었는데, 때때로 모여서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며 즐겼었다. 이종겸의 수연(壽宴)을 맞이하여 여러 친지와 고을 사람들이 축하하는 시문을 지었다. 이 시문집의 서문을 겸하여 정자의 기(記)를 짓게 된 것이다.
“내가 듣건대, 용구(龍駒)의 동쪽에 남곡이란 데가 있는데, 고려 말에 이 선생, 이름은 석지란 분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숨어 살며 덕을 심어 후손에게 끼쳤다. 두 손자를 두었는데 맏이는 종검이니, 첨지중추(僉知中樞)요, 막내는 종겸이니 군자판사(軍資判事)였다.…(중략)…
형과 아우가 자기 취미를 즐기고 명예욕은 전혀 없으며 일찍이 쌍계의 곁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효우(孝友)라 하고, 형과 아우가 산관야복(山冠野服)과 홍안(紅顔) 백발로 나날이 그 안에 거닐며 읊조리고 이야기하니 그 즐김이 고상하였다. 이따금 친척과 자제를 거느리고 『시경』과 『예기』를 강독하여 등불 아래 글 읽는 소리가 날 적에는 그 즐김이 흐뭇하며, 명절이 돌아오면 온 고을 부로(父老)들을 초청하여 술 마시고 바둑 두며 거나하게 취하는 그 즐김도 역시 다함이 없다.…(중략)…
아, 주(周) 성왕(成王)이 군진(君陳)을 명하면서 먼저 효우를 칭찬하였고, 윤길보(尹吉甫)가 장중(張仲)을 칭찬하면서도 역시 효우의 덕을 노래하였으니, 대개 효우란 것은 공명이나 관작에 비할 바 아니요, 모두 사람의 실덕(實德)과 실행일진대 어찌 헛된 찬양을 할 수 있겠는가. 거정이 이미 자진의 말을 믿는 처지요, 겸하여 가락(駕洛)의 서문을 채택해서 효우정기를 지었다.”
(吾聞龍駒之東 有南谷 高麗季 有李先生諱釋之者 休官歸隱 種德遺後 二孫 長曰宗儉 僉知中樞 季曰宗謙 軍資判事…(중략)…伯仲氏自適其適 無慕乎外 嘗於雙溪之傍 構亭曰孝友 伯仲氏 山冠野服 白鬚紅頰 日杖屐於其中 吟哦談笑 其樂嚚嚚然 時率親戚子弟 講讀詩禮 吾伊燈火 其樂油油然 至如歲時伏臘 壺樽棋搏 扶携酩酊 其樂亦無窮矣…(중략)…嗚呼 周成王命君陳 而首稱孝友美之 吉甫讚張仲 而先歌孝友之德 盖孝友者 非功名爵祿之比 皆人之實德實行 何可以虛譽爲哉 居正旣信子進之言 兼駕洛之序 作孝友亭記)
[의의와 평가]
남곡은 고려 말에 이석지가 은거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색(李穡)이 「남곡기(南谷記)」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으며, 서거정이 기꺼이 「효우정기」를 지어 더욱 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자취도 없어 이 두 기록에 의지해 당시의 정황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을 통해 남곡이 고려 말엽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당대의 저명한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명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