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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29
한자 白南式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6년연표보기 - 백남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연표보기 - 김진성·이용화 등과 광적면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만세배미에 모여 시위를 전개
몰년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연표보기 - 시위 중 헌병에게 저격당함
출생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거주|이주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활동지 만세배미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백남식(白南式)[1866~1919]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태어났다. 백남식은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리고 마을을 순방하며 시위 계획을 알리고 거사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는데, 이는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전개되면서부터였다. 백남식김진성(金辰成)·이용화(李龍和) 등과 함께 광적면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으며, 일장기를 변조하여 태극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효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민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시위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백남식이용화·김진성 등 동지들과 함께 진화 작업을 마친 후 4㎞ 거리인 가납리로 가서 만세 시위[가래비 3·1 만세 운동]를 전개하였다. 만세 시위를 전개했던 가납리 면민들이 해산을 하고 있을 때, 효촌리 주민들이 도착하였다. 그러자 가납리 면민들이 다시 모여들어 시위대는 약 950명에 이르게 되었고, 시위대는 현재의 만세배미[현재의 광적면사무소 앞에 있는 논]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얼마 후, 헌병 4명과 보조원이 의정부에서 급파되어 군중들에게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용화가 이들의 행동을 꾸짖자 시위대의 기세가 올라가며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시위대에 속해 있던 누군가가 돌팔매질을 하자 헌병들이 흥분해 발포를 하였다. 그 결과 백남식 등 세 사람이 사망하였고, 4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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