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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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屛虎是非 |
영어음역 | Byeonghosibi |
영어의미역 | Dispute of Ho Faction and Byeong Fac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진영 |
[정의]
1620년 이후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림이 호파(虎派)와 병파(屛派)로 나뉘어 전개한 쟁단[鄕戰].
[발단]
1620년(광해군 12)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는 여강서원(廬江書院: 1676년 호계서원으로 바뀌어 사액을 받음)을 건립하면서 종향자인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가운데 누구의 위패를 퇴계의 왼편에 둘지를 두고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애학(厓鶴)’이냐, ‘학애(鶴厓)’냐 하는 위차 문제였다.
애학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서애는 영의정을 지냈고 학봉은 관찰사를 역임했으니 관직의 높낮이로 결정하자고 주장하였고, 학애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우리 풍속에 나이가 우선이니 네 살이 위인 학봉이 왼쪽에 위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당시 영남을 대표하는 상주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자문을 구하여 서애를 왼쪽, 학봉을 오른쪽에 배향함으로써 위차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경과]
학봉과 서애의 위차 문제는 200여 년이 지난 1805년(순조 5) 다시 제기되었다. 당시 영남에서는 4현, 즉 서애·학봉·한강(寒岡) 정구(鄭逑)·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묘 종사를 청원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순서를 서애와 학봉 순으로 할지, 아니면 학봉과 서애의 순서로 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시비는 문묘 종사 운동이 성사되지 않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812년(순조 12) 호파 일각에서 호계서원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추가로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를 두고 병파에서는 적극 반대하였고, 결국 병파는 호계서원과 절연하고 서애의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옮겨버렸다. 병호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후 병파와 호파는 서로 대립하는 형세를 지속하게 되었다.
[결과]
병호시비를 보합(保合)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다름 아닌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세도 권력의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 집권했고, 같은 처지에 있었던 영남을 자신의 우호 세력으로서 삼고자 했다. 대원군이나 영남,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1866년(고종 3)부터 병호시비를 수습하고자 나섰다. 그 구체적인 역할을 당시 판중추부사이던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와 안동부사 심동신(沈東臣)에게 맡겼다. 대원군은 심동신에게 “영남의 선비들이 단합해야 그 기운으로 원자(元子: 고종의 아들)의 탄생을 바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충역(忠逆)과 관계된 일이다”라는 논리로 선비들을 설득하게 했다.
1870년(고종 7) 호계서원에서 호파 유림 600여 명, 병파 유림 4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심동신이 대원군의 지시를 전하면서 단합을 촉구하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대원군은 크게 실망하고 화를 내면서 다시 심동신과 류후조에게 지시했다. 9월에 이어 12월에는 마침내 호론과 병론을 대변하고 있는 『대산실기(大山實記)』와 『여강지(廬江誌)』 판본을 관정에서 파괴함으로써 보합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보합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을 뿐이었고, 400년이 지난 최근에야 호계서원의 사당 복원사업을 계기로 경상북도 당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서애를 왼쪽, 학봉을 오른쪽에 종향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