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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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林團義擧 |
영어의미역 | Worthy Undertaking of Confucians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등지의 유림 대표들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요구한 청원 운동.
[경과]
유림단 의거는 1차와 2차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 1차 유림단 의거
1차 유림단 의거는 처음 경상도 대표인 곽종석과 충청도 대표인 김복한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었으나, 하나로 합쳐져 김창숙이 중책을 맡았다. 김창숙은 3월 말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그곳에 모인 인사들과 이 문제를 협의하였는데, 이미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이 파리로 파견된 사실을 접한 뒤 한문본 2,000부와 영문본 3,000부를 인쇄하여 김규식에게 보내고 국내외 여러 곳에 발송하였다.
파리장서에 안동의 유림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도산면 하계의 이만규, 예안면 주진의 류필영, 임하면 천전의 김병식, 임동면 수곡의 류연박, 서후면 금계의 김양모 등이 장서에 서명을 하였다. 비록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논의 단계에 참여하여 경상북도의 분위기를 조성한 이중업과 장서를 안전하게 상하이로 가져가는 데 기여한 김응섭의 구실도 컸다. 이들의 참여는 안동 지역뿐 아니라 안동의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에도 파급되었다.
안동 지역 유림들의 독립 청원 운동은 파리장서 서명에 이어 1920~1921년 제2차, 제3차 독립 청원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중업은 그 일에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는데, 1920년 11월 파리장서 의거에 동참하였던 경상북도 지역 인물을 중심으로 중국의 유력 인사들에게 독립 청원서를 보내고자 하였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던 청원서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효과가 없자, 우리와 가까운 중국에 부탁하려 한 것이다.
이들은 3통의 청원서를 작성하여 광둥정부의 쑨원[孫文]과 중국 정부에 각각 1통, 그리고 중국 군벌 오패부(吳佩孚)에게 보내기로 했다. 중국에 청원서를 전달하고 유림들의 의지를 밝히는 대표로는 이중업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중업이 갑작스럽게 병사(病死)하면서 거사가 중단되었다. 유림들은 1921년 가을 김해 조경기의 발의로 3차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겼고, 쑨원에게 직접 청원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2. 2차 유림단 의거
2차 유림단 의거는 경상북도 유림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경북유림단 의거’로 불린다. 2차 유림단 의거는 1925년에서 1926년까지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에서 활약하던 김창숙이 주도하였다. 1925년 초 김창숙은 베이징에 유학하던 봉화 출신 김화식(金華植)과 영주 출신 송영호(宋永祜), 대구 출신 이봉노(李鳳魯) 등과 협의하여 중국에 땅을 구입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김창숙은 20만 원을 모은다는 계획을 세우고 6월 김화식과 송영호를 국내에 파견하였다. 이때 김화식에게 권총 두 자루를 가지고 들어왔다. 7월 국내로 몰래 들어온 김창숙은 서울에서 파리장서 의거에 참여했던 동지들을 모아놓고 계획을 알렸다. 여기에서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이라는 자금 모금단을 결성하였다. 그러고 나서 동지들을 경상도 각 지역으로 파견하여 본격적인 모금 사업에 들어갔다. 안동 지역을 담당한 연락책은 정수기였다.
정기수와 만나 경북유림단 의거를 주도한 사람은 안동 출신의 이동흠과 이종흠이다. 이종흠은 대구로 가서 아버지 이중업의 동지이었던 김창숙에게서 권총 1자루를 받아들고 외숙부인 이현병(李鉉炳)을 찾아간 뒤 자금 2만 원을 요구하였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종흠은 이 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한편 김창숙은 8개월 동안 국내를 누비면서 활약하였고, 활동 경비를 뺀 나머지 3,500원을 갖고 1926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의열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림단의거와 관련하여 안동 지역에서는 이중업 부자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중업 가문은 아버지 이만도 이후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만도의 의병 항쟁과 단식 순국에 이어, 이중업의 부인 김락(金洛)의 3·1운동 참여와 일제 경찰의 고문에 따른 실명(失明), 이중업의 파리장서 활동과 2차 독립 청원 시도, 그리고 두 아들 이동흠과 이종흠의 경북유림단 의거가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