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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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叔樑 |
영어음역 | Yi Sukryang |
이칭/별칭 | 대용(大用),매암(梅巖),선성삼필(宣城三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명수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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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519년 |
몰년 | 1592년 |
본관 | 영천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할아버지는 인제현감을 지낸 이흠(李欽),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효성(權孝誠)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숙량은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예안현(禮安縣) 분천리(汾川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였다고 한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업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치중하였다. 천거에 의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부름이 있자 억지로 한번 나아가 숙배(肅拜)했는데, 이 때 선조 임금이 손수 ‘선을 쌓은 집안에 경사가 넘친다’는 뜻의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여덟 자를 하사하였다. 맏형수 임씨(林氏)가 일찍 홀로 되어 대구의 친정집에 가 있었기 때문에 대구를 자주 왕래하였다. 이즈음 대구 연경리의 화암(畫巖)이라는 곳에 매암서당(梅巖書堂)을 짓고 『심경(心經)』 공부에 몰두하였다. 1563년(명종 18)에는 서당을 개축하여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창설하였다.
1570년(선조 3) 예안 지역의 퇴계 문도인 오천(烏川)의 김씨(金氏) 형제들, 조목(趙穆), 이안도(李安道) 등과 함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나아가 『심경』을 강독하여 이황의 칭송을 받았다. 또 아버지 이현보의 유풍을 계승하는 데도 힘썼다. 무너진 애일당(愛日堂)을 보수하는 한편, 이름을 영모당(永慕堂)으로 바꾸려고 했었다. 또한 구로회(九老會)를 이어받아 1578년과 1585년 두 차례에 걸쳐 연회를 베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조목, 금응협(琴應夾) 등과 함께 광현(廣峴)에 올라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의병을 일으키고자 동지들에게 격문을 돌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동 지역의 향병(鄕兵)이 잇달아 일어났고 지역 방위에 성과를 올렸다. 이숙량은 문사(文辭)와 필법(筆法)이 뛰어나 금보(琴輔), 오수영(吳守盈)과 함께 ‘선성삼필(宣城三筆)’이라 불렸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매암집(梅巖集)』 3권 1책이 있다. 또 보물 1202호로 지정된 『분천강호록(汾川講好錄)』 뒷부분에 이숙량이 지은 국문가사(國文歌詞)가 첨부되어 있다. 『분천강호록』은 이숙량이 예안현 분천리에서 시행하기 위해 제정한 동약(洞約)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이고, 동약은 효부모(孝父母), 우형제(友兄弟), 화친척(和親戚), 목인보(睦隣保) 등의 4개 조항을 골자로 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 정침(正寢)에 모여 경전을 강론함과 동시에 우호를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용두산(龍頭山) 도곡(道谷)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