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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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음역 | Goryeosidae |
영어의미역 | Goryeo, an Ancient Korean Sta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여성구 |
[정의]
936년 후백제 멸망 이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기도 안산시의 역사.
[개설]
안산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해 대규모의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지방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고, 외적의 침입도 잦았다. 한편 어향(御鄕)으로서 왕실에서도 중시했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
[행정구획 변천]
안산 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 또는 백제의 고사야홀차현(古斯也忽次縣)인데, 신라 진덕여왕 때 장구현으로 고쳤으며 신문왕 때 장구군(獐口郡)으로 승격하였다. 940년(태조 23) 오늘날과 같은 지명인 안산현(安山縣)으로 되었고,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 때 양광도 남경유수(南京留守)[양주]에 소속된 수주(水州)[수원]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1308년(충렬왕 34)에 덕종·정종·문종이 태어난 명예로운 고을이라 하여 안산군(安山郡)으로 승격되고, 지사(知事)의 다스림을 받았다. 이후 화성과 시흥, 그리고 과천의 승강(昇降)에 따라 약간의 변모를 보이기는 하나 조선 전기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삶과 생활]
신라와 고려시대에 안산 지역은 노루가 많아 사냥터로 많이 활용됐는데, 그래서 당시 지명은 장항구[일명 노루목]였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을 보면, “동쪽은 과천, 북쪽은 금천[시흥], 남쪽은 광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인구가 588명”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인구수는 이것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주로 반농반어로 생활했으며, 농경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근검을 풍속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래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업 활동도 활발해 잿머리 포구는 큰 배들이 오갈 수 있는 외항으로 축조되었으며, 무역에 종사하기 위하여 체류하는 중국인들이 점차 늘어나 당인촌(唐人村)을 형성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부도에서 발견된 ‘육곡 고려고분군’을 통해서도 당시 안산만 주변에 커다란 해상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들은 중국과 해상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한 상인 집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방 세력]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안산군의 토성(土姓)으로 김씨·안씨·방씨를 들고 있다. 그러나 고려 전기에 보이는 안산의 지방 세력으로는 김긍필이 대표적이다. 김긍필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으로 후에 안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긍필은 인천의 지방 세력과 혼인 관계를 맺어 더욱 세력을 공고히 하였고, 그의 아들 김은부는 인천이씨인 이허겸의 사위였다. 안산의 지리적 조건을 보았을 때, 김긍필은 서해안 일대에서 교역 활동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산 지역에서는 경순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특히 잿머리 성황당과 군자산 성황사에는 경순왕과 두 부인인 홍씨·안씨 부인 이야기가 서희와 관련하여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잿머리 성황당에는 서희 장군·홍씨 부인·안씨 부인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군자산 성황사에서는 경순왕과 부인 안씨를 모시고 각각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고려 전기 안산 지역은 친신라적인 성향이 강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향지로서 왕실에서 중시했던 안산]
안산 지역은 고려왕실의 덕종, 정종, 문종이 태어난 어향(御鄕)이었다. 이들의 외조부가 김은부였다. 김은부는 자신의 세 딸을 현종의 비로 들였는데, 첫째 딸은 원성태후로서 현종의 세 번째 비가 되어 덕종·정종과 인평왕후(仁平王后)·경숙공주(景肅公主)를 낳았다. 둘째 딸은 원혜태후로서 현종의 네 번째 비로 들어가 문종과 평양공 기(平壤公基), 효사왕후(孝思王后)를 낳았다. 셋째 딸은 원평태후로 현종의 일곱 번째 비로 들어가 효경공주(孝敬公主)를 낳았다.
이런 이유로 덕종의 탄신일인 응천절(應天節)과 정종의 장령절(長齡節), 그리고 문종의 천장절(天長節) 같은 궁중잔치 때면 안산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궁궐에 초대받아 참석했고, 안산에서도 열흘이 넘게 잔치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어향지로서의 안산은 고려왕실로부터 매우 후한 예우를 받아서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 같은 국경행사 역시 안산 지역에서는 지극히 성대하게 치러졌다. 또 1082년(문종 36) 9월에는 왕이 온수군(溫水郡)[온양]에 행차할 때 안산에 들려 이틀을 묵으며 군민을 위로했다고 한다.
[외적의 침입과 안산민의 저항]
삼국시대에 축조된 목내산성·성곡산성·별망산성·군자산성 등을 보면, 이 시기부터 삼국의 쟁패지로서 안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안산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로서 외적의 주요 침입로였다.
1256년(고종 43) 대부도 별초가 소래산 아래에서 몽골 군사 1백여 명을 격파하였다. 1271년(원종 12)에는 몽골군이 전선을 이끌고 대부도 등 안산 지역에 침입하자, 주민들은 민병을 조직하여 몽골군과 싸웠다. 이때 몽골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고, 그때의 승리로 수원부는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수원부사 안열(安悅)은 도호부사로 승진되었다. 이밖에 별망성은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쟁 때 주민 보호를 위한 방어 진지였고, 삼별초를 이끈 장군 김통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안산이 대몽항쟁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들어서는 왜구의 침입이 매우 성했다. 1378년 2월, 왜적이 안산·인주(仁州)·부평(富平)·금주(衿州)를 침공하였고, 이듬해에도 왜적이 안산군에 침입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