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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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山郡 |
영어의미역 | Ansan-gun |
이칭/별칭 | 연성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여성구 |
[정의]
940년부터 1914년까지 경기도 안산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안산군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 또는 고사야홀차현(古斯也忽次縣)이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에 장구군(獐口郡)으로 되었다. 고려 초[940년(태조 23)]에 장구군을 안산군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 5도 양계제가 시행될 때, 안산현이라 하여 수주군(水州郡)[현 수원시]의 속현으로 삼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다시 1308년(충렬왕 34)에 문종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시켜 양광도 안산군이 되었다.
[관련기록]
안산군에 관해서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호수 302호, 인구 588명, 군인은 시위군(侍衛軍)이 1명, 선군(船軍)이 115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고려시대 안산군으로 승격된 후 지방관으로 지군사가 파견되어 다스렸으며, 이때 관아·향교·군영 등이 제대로 갖춰졌을 것으로 보인다. 관아는 지금의 안산시 성곡동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후 수주[현 화성시]와 금천[현 시흥시], 그리고 과주[현 과천시]의 승강(昇降)에 따라 약간의 변모를 보이기는 하나 조선 초기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연성군(蓮城郡)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지방관으로 군수가 파견되었다. 관아는 고려시대의 관아를 사용하다가, 이곳에 조선 문종비의 능인 소릉(昭陵)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관아 터가 있는 수암동 수리산 서쪽 밑으로 옮겼다.
안산은 이전 시기부터 서해안을 지키는 요충지이었기 때문에 석곡역과 함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파견된 사곶[沙串, 草芝]에 부대가 주둔하였다. 봉화는 옷애[吾叱哀][현 오이도]·무응고리(無應古里) 등 두 곳에 있었고, 이들 봉화는 인천-성산-남양의 봉화와 함께 서해안 방어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개편할 때 인천부에 속했으며, 이듬해 전국 규모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경기도 안산군이 되었다. 1906년(광무 10) 월경지 정리 계획에 따라 광주군에 속해 있던 성곶면·월곡면·북방면이 안산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안산군이 폐지되고 군내면·인화면·초산면이 수암면으로, 마유면·대월면·와리면이 군자면으로 통합되어 시흥군에 병합되었으며, 월곡면·북방면·성곶면은 반월면으로 통합되어 수원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안산이라는 지명은 없어지고 1976년 경기도 반월도시개발 지원사업소, 1979년 수암면·군자면의 13개 리와 화성군 반월면 일부에 경기도 반월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6년 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안산군은 고려 초부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없어질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서해안의 교역 중심지이었다. 또한 서해안과 통하는 교통로로서 외적의 침입을 받기도 했지만, 안산 주민들의 투철한 저항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이러한 저항 의식은 일제강점기의 3·1운동과 교육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반농반어의 생활은 안산 주민들에게 능동적인 문물 수용의 태도를 갖게 했고, 조선시대 이후 학문뿐 아니라 서화(書畵)의 성행과 실학이 발달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