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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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Dunbaeminori |
영어의미역 | Dunbaemi Folk Game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
집필자 | 이현우 |
[정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둔배미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속놀이.
[개설]
둔배미놀이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출항할 때, 또는 만선으로 귀항할 때 부르던 「배치기 소리」와 신길동 농요를 접합시켜 연출한 민속놀이이다. 둔배미의 수호신은 뱀신인 긴대선왕님[도당 할아버지와 도당 할머니]으로, 이를 모신 당집에서 격년으로 도당굿을 벌여 왔다.
성어기를 맞은 마을 어부들은 출항하기 전날 밤 화장[밥짓는 이]만 배를 지키게 하고, 선주를 비롯한 선원 전원은 목욕재계하고 당집으로 가서 한마음이 되어 만선과 무사귀환이라는 절실한 소망을 소지로 올린다. 이어 선원들이 선주를 위하여 징·꽹과리·북·새납[태평소] 등을 들고 만선풍어노래인 「배치기」를 흥겹게 부른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출어에 대한 불안이 풍어[만선]를 기대하는 신념으로 바뀌고, 그 열기가 그대로 이어져 다음날 물때에 맞춰 고기잡이를 나선다.
둔배미놀이는 이러한 둔배미 어부들의 출항에 대한 염려와 도장원[만선] 귀항에의 기원을 민속놀이화한 것이다. 서해안에 접한 농촌이라는 안산의 지역적 특수성을 살려 어부들이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마을에서 논매기 작업에 몰두하던 농부들의 농요가 여기에 어우러져 발달된 것이다. 즉 배치기 소리와 농촌의 노동요가 한데 어우러진 대동축제가 안산 둔배미놀이이다.
[연원]
대대로 옛 안산군에 세거(世居)한 가문으로 초지동의 원포[둔배미]에서 거주한 바 있는 전용안[당시 88세]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다. 둔배미마을에는 도당신과 임경업 장군을 모신 당집이 있어, 그 당에서 당제를 지내는 풍습이 해방 무렵까지도 계속되었다. 신길리 일대에서도 정월에는 2년마다 2일간이나 광대를 초청해 ‘거리굿’을 하였는데, 이때에도 배치기놀이가 있었다.
또 매년 음력 7월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정제(井祭)를 지내기 위해 동네 길닦음과 공동우물을 청소한 후 멍석 등으로 우물을 덮고 우물 앞에서 소를 잡았는데, 그 살코기는 가가호호 균등 분배하고 나머지 뼈와 내장 등은 놀이를 하면서 주민 전체가 먹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당시만 해도 둔배미 포구에는 7~8척의 고기잡이 중선(重船)과 10여 척의 낚싯배, 그리고 나무를 실어 나르는 시선(柴船)들이 항상 눈에 띄었다. 그런 어선들이 만선 귀항하면 온 마을이 배치기놀이로 들떴고, 농민과 아낙네들의 농요 가락이 한데 어우러져 흥겨웠다고 한다.
[놀이도구 및 장소]
예전에는 포구에 어선을 선착해 놓고 서낭당에서 포구까지 전 마당이 놀이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안산 지역에 포구가 없어지고 도시화되면서 놀이장소는 자연스럽게 운동장이 되었고, 어선은 트럭을 이용하여 조립식으로 만들었다. 놀이 도구는 어선과 어선에서 쓰이는 어로구 일체, 「배치기 소리」를 할 때 사용되는 괭가리·북·징·태평소 등이며 장구는 쓰지 않는다. 농요를 부를 때 우장·호미 등이 도구로 쓰였으나 현재 농요는 하지 않고 「배치기 소리」와 성황당고사로만 연출된다.
[놀이방법]
1. 성황당고사[서낭제]
어부들이 “이번 고기잡이에 아무 사고 없이 만선 귀항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성황님께 제를 올리는 의식으로, 둔배미 원포(元浦)에 있는 당집이 배치기의 첫 행사장이 된다. ①선주와 선주 부인을 선두로, 어부와 그 아낙들은 떡시루와 음식을 성황당에 차려 놓고, ②선주가 제관이 되어 도사공들 양옆에 선다. ③선주가 먼저 성황님께 잔을 올리고 재배를 하고 나면, ④도사공은 선원들을 대표해서 성황신께 재배를 드린다.
⑤선원들과 아낙들은 뒤에서 반절을 올린다. ⑥도사공은 선주가 내주는 소지를 받아들고 소제를 올린다. ⑦선주는 도사공에게 봉죽을 건네준다[원래 당주(堂主)가 있을 때는 선주에게 봉죽을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⑧사공들은 성황당 산신기와 임장군기·백기를 제각기 받아들고 「배치기 소리」와 풍물을 울리며 배로 향한다.
2. 길놀이
①어부들의 배치기, 풍물행진에 아낙들과 농민들이 화답·합류해서 배를 향해 길놀이를 벌인다. ②용왕제를 모실 떡시루와 음식을 머리에 인 아낙들이 배 옆에 이르러 춤을 추고, 선원들은 용왕제를 위한 승선 준비를 한다.
「배치기」[메김소리]: 봉죽을 받었다 봉죽을 받어/ 도당할아버지한테 봉죽을 받어// 도당 신령님 귀히 보셔/ 우리 배에다 도장원 주신다// 봉죽을 받었다 봉죽을 받어/ 도당할머니한테 봉죽을 받어.
3. 용왕제 및 선상배치기
①어부들은 들고 간 모든 기를 배 위에 꽂아 놓고 용왕제를 모신다. ②이때 아낙들은 선상에는 못 올라가고, 남편들의 무사고와 만선 귀항을 빌며 배와 바다를 향해 합장배례만 할 뿐이다. ③선원들은 용왕제를 모신 다음 배가 출항하기에 앞서 동리 사람들과 아낙들이 보는 데서 선상배치기놀이를 한다.
④이 배치기는 그냥 놀이가 아니라 이번 행선에서는 자기네 배가 고기를 제일 많이 잡아가지고 만선으로 돌아오리라는, 즉 만선 귀항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동리 사람들과 아낙네들도 배치기의 받는 소리를 함께 하며 축원을 해준다. ⑤농민들과 아낙들이 배치기의 받는 소리를 같이 하며 축원을 북돋아준다.
「배치기」[메김소리] 안산 바다에 널린 고기를/ 우리네 선민들 다 잡아 올리자// 재산더미에 닻을 주고/ 천량떠미나 쟁기를 준다// 나갈 적에는 중군북이요/ 들어올 때는 승전북이라네// 연평 바다에 널린 천량/ 자치만 남기고 다 잡아와 들여라// 배쥔 아주머니 정성으로/ 안산 바다에 도장원 할 걸세// 칠산 바다 널린 재산/ 우리 중선이 다 잡아 올리세.
4. 어부들의 행선
①어부들은 배치기가 끝날 무렵 그 소리와 장단에 맞춰 노를 젓기 시작하며, ②서서히 노젓는 소리로 바뀌면서 바다를 향해 떠나는데, 용왕제를 모셨던 술과 돼지머리 음식은 모두 바다에 뿌리며 행선한다. ③아낙들과 농민들은 배가 멀리 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이별을 한다.
「배치기」[메김소리] 화장놈아 돛올려라 안-산 바다에 널린 고기/ 물때가 늦으며 큰일난다 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 보세/ 어기야 디야차 어이기야 화장애야 밥지어라/ 빨리 저어라 어야디야 배고파서 노 못 젓겠다.
5. 농요(「양산도」 및 「방아 소리」)
①남편들은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났으니 농사일은 아낙네들과 연로하여 고기잡이를 못 나가는 노인네들의 몫이 된다. ②여기서 안산 지방 고유의 농요[방아소리]가 둔배미놀이의 한 쪽 기둥을 이루게 된다. ③이곳 농요가 다른 지방과 특별히 다른 것은 처음에는 양산도로 느린 동작을 하다가, 해질 무렵에는 방아타령을 부르며 빠른 동작으로 일 끝을 맺는 점이다.
「논매는 양산도」[메김소리] 어화 농부들 이내 말씀을 듣―소/ 하지 대본은 농사로오―다// 농자는 천하지 대본―이요/ 우리 모두 농사를 지읍시다// 어화 조사야 논두렁을 둘러라/ 우리 모두 김매러 간―다// 풍년이 들었다 풍년이로―다/ 안산 천지에 풍년이로―다// 작년에도 풍년이 들고서/ 금년에―도 풍년이로―다// 어화 농부님네들 이내 말씀을 듣―소/ 시화 연풍에 국태민안이―라네// 이논 뱀이를 다맷으면―은/ 다음 논으로 너머를 갑시다// 금년 농사를 잘 지―어―서/ 나라 봉―공하여 봅시다// 나라 봉―공하고 나아면/ 부모님 봉양도 하여 봅시이다// 부모님 봉양을 다 하였으―면/ 처자 권속도 거느려야―아지// 양산도오는 고―만 하아고/ 방아소리로 넘겨를 봅시다.
「어럴럴상세디야」[메김소리]: 상쇠부쇠는 어부쇠라/ 어깨에다 우장을 메고/ 우장에다 호미를 걸고/ 농기를 들고 농악을 치며/ 우리 모두 김매러 가세/ 여보시요 농부님네들/ 이내 말씀을 잘 들어보소/ 농─사는 천하지 대본/ 농사밖에 또 있으랴/ 농─사를 잘 지어야/ 태평성대를 누려 보지/ 젊은이들은 배를 타고/ 안산 바다로 돈실러 가고/ 늙으신 분들과 아낙네들은/ 농사일을 맡아서 하니.
6. 만선 귀항
①그물 가득 잡은 고기들을 퍼 올리며 바디질소리를 부른다. ②바다로 떠났던 남편들이 배에다 만선 오색기를 달고, 백포장 둘러치고 풍물을 울리며 목청 높이 배치기소리 흥겹게 포구를 향하여 들어온다. ③이때가 바로 이 어촌의 대경사이자 축제날이 된다[축제소리].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안산 지역은 어업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포구 마을마다 ‘배치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둔배미, 성머리 포구[현재의 성포동] 및 와리 쪽의 생산놀이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도 그 맥을 이어 왔다. 이러한 어로문화는 군자동의 능길, 수암동·반월동, 독주골[성포동]의 농요와 어우러져 이 고장 특유의 노동문화를 이루는 기둥이 되었다.
특히 둔배미의 배치기는 원포의 당집에 뿌리를 둔 전통을 갖고 있다. 이와 짝이 되는 농경문화 가운데 능길[군자동 신길리]의 농요는 「방아 소리」와 「양산도」로 구성된 노동요로서, 옛날 가락과 노랫말이 녹취되어 원형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김수옥의 사망 이후 소리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이 놀이는 어업과 농사라는 두 개의 생활 근간이 한데 어우러져서 형성되는 기층민들의 대동축제이며, 노동요를 통해 어렵고 힘든 생활을 이겨내며 이 땅에서 면면이 삶을 영위해 온 조상들의 땀과 한으로 빚어진 놀이이기도 하다.
[현황]
원포[둔배미]의 배치기와 유사한 어부들의 놀이는 당시 어촌이었던 시흥군 수암면 성머리포구[현 안산시 성포동]에도 있었으며, 이곳 배치기는 정월에 행해지는 풍어놀이로서 성머리놀이라고 했었다. 이러한 놀이들은 풍어를 빌거나 만선의 기쁨을 나누는 신나는 대동축제였다. 안산 지역에서는 해마다 그런 놀이가 몇 차례씩 벌어짐으로써 주민 간의 인보상조(隣保相助) 정신과 친목·협동정신을 기르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옛날 시흥군 군자면 신길리 일대에서 불리던 농요는 이미 농요를 부를 줄 아는 사람들이 모두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생전에 녹화·녹취를 통해 소리만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었지만, 그 외의 다른 동리 농요와 두레패의 농악놀이는 제방공사·간척사업 등이 벌어지면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 특히 안산 신도시의 개발에 따라 원주민들이 흩어져 그 맥마저도 끊기다시피 되었다.
1987년 이래 국악 재담가 고(故) 박해일[당시 67세, 국악협회 안산지부]은 안산 지방의 전통예술 및 민속놀이 조사를 계속하여 진행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 봄부터는 안산시 문화공보담당관실에서 안산의 농요 및 배치기 복원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고, 1989년 9월에는 원포 배치기와 신길리 농요를 합친 대동축제로서 ‘안산 둔배미놀이’를 처음으로 재연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 9월 9일 제6회 경기도민속경연대회[안양]에 참가하여 종합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2월에는 경기도에서 ‘민속보존놀이’로 지정[안산시에서 보존회 구성]하였다.
1990년 7월 ‘안산민속놀이보존회’ 발족 이후 안산시의 주요 문화행사 때마다 참가하여 공연했으며, 2005년과 2007년 9월 경기도민속예술축제에 각각 참가하였다. 현재 안산문화원 부설 둔배미놀이보존회에서 놀이와 소리의 보존·전승을 위해 애쓰고 있으나 둔배미배치기 소리를 하던 분들은 모두 고인이 되고 천병희[남, 83] 한 분만 생존하고 있다. 또한 신길동 농요는 소리를 하던 분들이 모두 고인이 되어 그 맥이 끊어진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