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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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觀善齋 |
영어공식명칭 | Gwanseonjae |
이칭/별칭 | 강당사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강당로 300[강당리 32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상권 |
건립 시기/일시 | 1707년 - 외암정사 건립 후 관선재 당호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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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765년 - 관선재 중수 |
현 소재지 | 관선재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강당로 300[강당리 320] |
성격 | 서재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강당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이간의 서재.
[개설]
관선재(觀善齋)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으로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유학자 외암(巍巖) 이간(李柬)[1677~1727]이 1707년(숙종 33)에 강학 공간으로 지은 외암정사에 덧붙여진 이름이며, 흔히 ‘강당’이라고 불렸다.
[위치]
아산시 송악면 외암마을에서 남쪽의 광덕산 강당골 방향으로 1.5㎞ 정도 올라가면 강당골계곡 옆의 관선재를 만날 수 있다. 광덕산[699.3m]의 북북서쪽 계곡이며 강당사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변천]
외암 이간이 1707년에 외암정사를 완공한 뒤 스승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로부터 ‘관선재’라는 당호를 받았다. 1765년(영조 41)에 중수한 사실이 상량문을 통해 최근에 확인되었다. 1811년(순조 11)에 이간에게 왕명으로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816년[추정]에 외암정사를 서원 성격의 외암서사로 바꾸었다. 이후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외암서사가 위기에 처하자 공주 마곡사에 있는 불상을 모셔 와서 강당사라는 사찰로 변모하였다. 이를 통해 훼철을 모면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형태]
관선재는 튼 ‘ㅁ’ 자 형태의 건물인데 건립 당시의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다. ‘ㄱ’ 자 형태의 본채를 기본으로 맞은편 높은 석축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집[외통집] 별채가 있고 대문과 문간채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외부에 ‘관선재’ 편액이 걸려 있는 본채는 중앙의 마루를 중심으로 양 옆에 2개의 3칸 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깥쪽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현황]
관선재의 동쪽에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본채가 있고 왼쪽에 별채가 있다. 별채 건물은 오랫동안 법당으로 이용되다가 1999년에 밖에 대웅전을 짓고 그 자리에 홑집 건물을 새로 지은 뒤에 중앙에 외암 이간과 천서(泉西) 윤혼(尹焜)[1676~1725]의 제사를 지내는 문천사(文泉祀), 오른쪽에 인지헌(人智軒), 그 왼쪽은 이간의 문집 『외암유고』의 목판 307매를 보관하던 외암집판장 현판이 걸려 있다. 목판은 1999년까지 본채 마루에 보관해 왔고 2017년에 바깥에 별도 건물을 지어 옮겼다. 본채는 강당사 스님들의 살림집인 요사채로 이용되고 있다. 힘찬 초서체의 ‘관선재’ 글씨는 수암 권상하의 글씨라는 설과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는 설이 있는데 당호를 내려 준 권상하의 글씨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관선재는 조선 후기의 학자 외암 이간이 강학 공간으로 지은 외암정사 건물이며, 벗이자 사돈인 윤혼과 함께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다. 후에 서원으로 이어지다가 조선 말 서원 철폐를 피해 다시 강당사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선재는 유교와 불교가 조화롭게 공생함을 보여 주는 특별하고 뜻 깊은 아산의 문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