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92
한자 李柬
영어공식명칭 Lee Gan
이칭/별칭 공거(公擧),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선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77년연표보기 - 이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08년 - 이간 권상하 문인이 됨
활동 시기/일시 1709년 - 이간 한원진과 성리설에 대한 논변 시작, 「한산기행시」 저술
활동 시기/일시 1712년 - 이간 권상하의 만류로 한원진과의 논쟁 중단
활동 시기/일시 1714년 - 이간 「미발변」 저술
활동 시기/일시 1717년 - 이간 종부주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5년 - 이간 회덕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및 경연관에 발탁됨
몰년 시기/일시 1727년연표보기 - 이간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60년 - 이간 문집 발간
추모 시기/일시 1777년 - 이간 이조참판, 성균관좨주 추증
추모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이간 이조판서 증직 및 문정 시호 받음, 외암서사에 제향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19-6[외암리 196]지도보기
수학|강학지 관선재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강당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이간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210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문천사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강당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예안
대표 관직|경력 종부주부|경연관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호락논쟁에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학자.

[개설]

이간(李柬)[1677~1727]은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거부하고 문장과 경전 공부에 몰두하였으며,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 토론을 즐겼다. 조선 숙종 때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같은 문인인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과 벌인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호락논쟁은 이후 200년 이상 기호학파 내에서 계속되었다.

[가계]

이간의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이다. 예안이씨(禮安李氏)외암마을에 세거하기 시작한 때는 이간의 5대조인 이사종(李嗣宗)이 평택진씨(平澤陳氏) 참봉(參奉) 진한평(陳漢平)의 사위로 처가가 있던 외암마을에 거주하면서부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진문(李振門), 할아버지는 충청도수군절도사·태안군수 겸 방어사(防禦使)를 지낸 이박(李璞)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태정(李泰貞)인데, 큰아버지인 부호군(副護軍) 이태형(李泰亨)에게 양자로 갔다. 처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윤헌(尹㦥)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간은 4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0세 때에는 서울에 거처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의 동학(同學)으로는 기원(杞園) 어유봉(魚有鳳)이 있다. 15세 때에는 숙부의 근무지인 평안도 자산에서 학문을 계속하였다. 이때 문루 현판에 글을 게시했는데, 그 필법이 웅대하고 건장하여 보는 이마다 감탄하였다고 한다. 20세에 혼인하였으며 21세에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상례를 극진히 하여 모셨다.

1706년(숙종 32) 서울로 올라가 한수(漢水)에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도를 논하였다. 32세 때인 1708년(숙종 34) 권상하를 찾아가 문인이 되고, 권상하로부터 ‘추월헌’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때는 권상하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청풍면 황강리에서 유학의 종장(宗匠)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1709년(숙종 35) 최징후(崔徵厚)를 통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편지를 읽어보고, 성리설에 대한 논변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보령현[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한산사(寒山寺)에서 한원진을 만나 각자의 입장을 정리하였고, 돌아와서 「한산기행시(寒山記行詩)」를 지었다. 1710년(숙종 36)에는 이만성(李晚成)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12년(숙종 38)에는 한원진과 계속 편지로 논쟁을 벌이다가 스승 권상하의 만류로 중단하고, 권상하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였다. 1714년(숙종 40) 「미발변(未發辨)」을 지어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였다.

1715년(숙종 41) 세자시강원 자의(諮議)에 천거되자 사양하였고, 1717년(숙종 43) 종부주부(宗府主簿)에 임명되었다. 1725년(영조 1) 회덕현감에 임명되자 부모 봉양을 위해 출사했으나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몇 달 만에 사직했으며, 1725년 12월 경연관(經筵官)에 발탁되었다. 1726년(영조 2) 충청도사(忠淸都事) 겸 해운판관(海運判官),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727년(영조 3) 51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간은 조선 중기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 이어 전개된 조선 후기의 호락논쟁을 주도하였다. 호락논쟁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내에서 일어났다. 권상하의 문하에 한원진, 이간, 윤봉구(尹鳳九), 최징후(崔徵后), 성만징(成萬徵), 현상벽(玄尙壁), 채지홍(蔡之洪), 한홍조(韓弘祚) 등의 강문팔학사 사이에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주제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특히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간의 주장은 주로 낙양(洛陽), 즉 서울·경기 지역의 학자들이 많이 동조해서 낙론이라고 하였다. 호서(湖西), 즉 충청도의 학자들은 대개 한원진의 주장에 동조했기 때문에 호론이라고 하였다. 낙론과 호론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인물성동이론, 즉 금수(禽獸)도 사람처럼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을 가지고 있나 없나 하는 문제이다. 또 하나는 사람이 정(情)[희노애락]이 발동하지 않은 미발의 상태일 때 선악이 나타날 수 있는 기질이 있나 없나 하는 문제였다. 이간은 금수도 오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물성동론과 미발일 때는 심체(心體)가 순선(純善)하기 때문에 굳이 작동하지 않는 기질을 겸하여 말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원진은 오상은 금수에게는 없고 미발일 때에도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고 선악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간의 학설을 지지·계승한 학자들은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 어유봉, 김창흡 등이었고, 한원진의 학설은 윤봉구, 최징후, 채지홍 등이 지지하였다.

호락논쟁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극심해진 사회적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성리학자들이 벌인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이다. 또한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만주족이 한족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청나라가 발전하는 모습과 유교 덕치의 실현 모습을 두고 벌어진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었다.

이간은 일찍이 광덕산 강당골관선재(觀善齋)를 짓고 사돈이자 벗인 윤혼(尹焜)과 함께 학문 연마와 강론에 전념하였다. 이곳은 후에 외암서사(巍巖書社)로 불리다가 ‘외암서원’이라고도 했는데, 외암이 시호를 받았을 때의 일로 추정된다. 이때 부조묘(不祧廟)[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받은 신주를 모시는 사당]를 명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를 피해 공주 마곡사에서 불상을 가져와 강당사(講堂寺)라는 절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간의 저서로는 『외암유고[외암집]』가 있다. 2008년 외암사상연구소에서 이를 근간으로 각주를 달고 국역한 『(역주)외암 이간의 철학과 삶』을 출간하였다.

[묘소]

이간 묘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있다가 1751년(영조 27) 송악면 외암리 서북쪽 삼상당[삼승댕이]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암민속마을 입구 다리 건너기 전 오른쪽에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홍직필(洪直弼)이 짓고, 판돈령부사(判敦零府事)를 지낸 윤용구(尹用求)가 썼으며, 이간의 6세손이며 참판을 지낸 이정렬(李貞烈)이 글을 새겨 1924년에 세운 이간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777년(정조 1) 이조참판과 성균관좨주에 추증되었으며, 1802년(순조 2)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온양의 외암서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002년 강당사 내의 관선재와 마주 보는 문천사(文泉祠)에 윤혼(尹焜)의 위패와 함께 모셔져 있고, 매년 5월 30일 제향을 지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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