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70 |
---|---|
한자 | 牙山外巖- |
이칭/별칭 | 외암민속마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9번길 13-2[외암리 20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남상권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8년 - 아산 외암마을 충청남도 민속보존마을 지정 |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2년 - 아산 외암마을 충청남도 민속관광마을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8년 - 아산 외암마을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0년 1월 7일 - 아산 외암마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6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1년 - 아산 외암마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7년 - 아산 외암마을 중요민속자료에서 국가민속문화재로 명칭 변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아산 외암마을 국가민속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9번길 13-2[외암리 203] |
성격 | 민속마을 |
관리자 | 외암민속마을 보존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가민속문화재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통 마을.
[개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마을은 조선 후기 이후 500여 년 동안 예안이씨가 세거(世居)해 온 마을이다. 외암마을 북서쪽 역촌리에는 고려시대부터 역(驛)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시흥역(時興驛)이 있었는데, 외암마을 자리는 그 역에서 관리하는 말을 키우던 장소여서 외양골[오양골]이라 하였다. ‘외양골’이 ‘외암골’로 바뀌고 행정지명으로 ‘외암리’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치]
아산 외암마을은 충청남도 아산시의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5.7㎞ 지점에 있다. 국도 39호선[외암로]을 이용해서 송악면 소재지인 송악면 역촌리에 이른 뒤 동쪽으로 접어들면 아산 외암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변천]
아산 외암마을은 조선 후기 이후 500여 년 동안 예안이씨가 세거해 온 마을이다. 그전에는 외암마을 자리에 강(姜)씨와 목(睦)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두 성씨 외에 남쪽 400m 지점의 골말에 평택진씨가 살았는데, 아들이 없는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맏사위로, 예안이씨 이사종(李嗣宗)[?~1589]이 1546년에 장가들어 골말로 들어온 뒤 외암마을 자리로 옮겨 살기 시작한 이후 점차 예안이씨 온양파의 집성촌이 되었다. 조선 후기 문신 외암(巍巖) 이간(李柬)[1677~1727]에 이르러 완벽하게 예안이씨의 마을로 자리 잡았다. 이간은 이사종의 5대손으로,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외암의 이론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뒤에 사상적 변화를 이끌었던 북학파(北學派)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외암마을이 예안이씨의 마을이 된 것을 선언하듯 마을 이름으로 호를 삼은 외암 이간은 예안이씨를 결속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고, 외암마을은 조선 후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반촌이 되었다.
1978년 충청남도 지정 민속보존마을, 1982년 민속관광마을을 거쳐 1988년 국가 지정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1월 7일에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었으며, 중요민속자료는 2017년에 국가민속문화재로 명칭이 바뀌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2011년에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형태]
아산 외암마을은 마을의 진산[배산]이자 옛 온양군의 상징적 산인 설화산의 남서쪽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의 진산인 설화산은 풍수지리 관점에서 문필봉(文筆峯)이라 하여 인재가 많이 났다고 하며, 마을 위치는 광덕산을 기준으로 하여 회룡고조(回龍顧祖) 형국으로 본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지형에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는 동고서저(東高西低) 형태이다. 마을의 입지(立地)는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조량이 많으며 앞쪽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아산 외암마을은 마을 가운데의 큰길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나뭇가지처럼 골목길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양반 가옥인 기와집과 평민 가옥인 초가집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집마다 설화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생활용수와 설화산의 화기(火氣)를 잠재우기 위한 방화용수로 사용하였고, 마당 한쪽에 연못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마을 자리에서 많이 나는 돌을 활용하여 담을 쌓았으며, 마을에는 6㎞가 넘는 돌담길이 있어서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마을 동쪽 북박골[기린곡]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마을 남쪽을 감돌아 흐르다 서쪽의 마을 어귀 반석거리에서 외암천에 합류하여 합수구를 이룬다. 광덕산 북쪽 강당골에서 북쪽으로 흘러온 외암천은 외암마을을 지난 뒤 북서 방향으로 흘러 온양천에 합류한다. 마을 북쪽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구릉은 모두 개간되어 논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서라리들이라 부른다.
[현황]
아산 외암마을은 50여 호로 이루어진 전통 민속 마을이며, 주로 기와집인 양반 가옥은 대부분 택호(宅號)가 붙어 있다.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이면서 마을 주요 가옥인 아산 건재고택(建齋古宅)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33호, 아산 외암마을 참판댁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95호로 별도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종손댁, 송화댁, 감찰댁, 교수댁, 참봉댁 등 여러 가옥이 어우러져 마을을 이루고 있다.
아산 건재고택은 예안이씨 18세 이상익이 짓고 아들 건재당(健齋堂) 이욱렬이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이상익이 영암군수를 지내서 오랫동안 ‘영암군수댁’으로 불렸다. 참판댁의 건축 연대는 19세기 말로 추정되며, 구한말 규장각의 직학사를 지낸 퇴호(退湖) 이정렬(李貞烈)이 고종 황제로부터 자금을 하사받아 지은 집이라 전해진다. 또한, 참판댁은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11호인 연엽주(蓮葉酒)를 빚는 곳이다. 송화댁은 이사종의 9대손 이장현이 송화군수를 역임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교수댁은 성균관교수를 지낸 예안이씨 20세 이용구가 인수하여 살던 집이다. 마을 보존과 관리를 위해 외암민속마을 보존회가 꾸려져 있고, 2000년부터 마을의 특성에 맞는 축제가 시작되어 외암민속마을 짚풀문화제로 계속되고 있다.
유물 677점은 체계적인 자료정리 및 관리보존을 위해 연구원에 기탁됐다. 유물은 고서 77건 149점, 고문서 212건 232점, 근현대 문서 140건 222점, 생활품 33건 74점이다. 외암유고·외암집을 비롯한 예안이씨의 문집과 족보, 백패·홍패·교지 등의 교령류, 예안이씨의 사회경제상을 가늠할 수 있는 호구단자·추수기·계약서와 이들이 즐겨 읽었던 유교경전과 삼국지·수호지 등의 고전소설, 반닫이·뒤주·채반·대야·이남박·홍두깨 등의 생활민속품류 등이 총망라돼 있다.
[의의와 평가]
아산 외암마을은 대부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점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충청남도에서 마을 단위로는 유일하게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기본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400여 년이나 되는 마을로서, 전통이 살아 숨쉬는 민속 마을이며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관광지이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21.01.05 | 업데이트 | [현황] 업데이트 "유물 677점은 체계적인 자료정리 및 관리보존을 위해 연구원에 기탁됐다. 유물은 고서 77건 149점, 고문서 212건 232점, 근현대 문서 140건 222점, 생활품 33건 74점이다. 외암유고·외암집을 비롯한 예안이씨의 문집과 족보, 백패·홍패·교지 등의 교령류, 예안이씨의 사회경제상을 가늠할 수 있는 호구단자·추수기·계약서와 이들이 즐겨 읽었던 유교경전과 삼국지·수호지 등의 고전소설, 반닫이·뒤주·채반·대야·이남박·홍두깨 등의 생활민속품류 등이 총망라돼 있다." 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