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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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昌斥和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서부남로 844[읍내리 280-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민규 |
건립 시기/일시 | 1871년 - 신창척화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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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69년 - 신창척화비 신창초등학교 교정으로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신창척화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6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신창척화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이전 시기/일시 | 1987년 - 신창척화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로 이전 |
현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서부남로 844[읍내리 280-1] |
성격 | 비석 |
관련 인물 | 흥선대원군 |
재질 | 화강석 |
크기(높이,너비,두께) | 144㎝[높이]|41.4㎝[너비]|17.4㎝[두께]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에 있는 개화기의 척화비.
[개설]
척화비(斥和碑)는 척양비(斥洋碑), 위정척사비(衛正斥邪碑) 등으로도 불리며,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은 뒤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전국에 세워진 비석이다.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한사계(韓史綮)』에는 "대원군이 스스로 양인(洋人)을 여러 번 물리치고 자못 교만한 뜻이 있어 이에 경계하는 글을 지으니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며, 돌에 새겨 팔도(八道) 사도(四都)로 통하는 길에 세우게 했으니, 이른바 척양비(斥洋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민치량(閔致亮)의 『난록(爛錄)』에는 척화비의 열두 글자를 대원군이 직접 큰 글씨로 쓰고 집에 걸어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건립 경위]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의 명에 의해 1871년 전국 200여 곳에 세워졌으며, 신창척화비도 그 시기에 세워졌다.
[위치]
신창척화비는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의 신창초등학교 진입로 입구의 왼쪽 길가에 있다. 원래 있던 곳은 현 위치 남쪽 50m 정도 지점 길가, 서부남로 동쪽이었다.
[형태]
신창척화비는 네모진 화강석 받침돌 위에 몸돌[비신]만 세워져 있다. 척화비는 전국에 설치되었는데 새겨진 내용과 서체(書體)가 동일하여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비석의 형태는 곳곳이 다른데, 비신 윗면이 둥근 원수형(圓首形) 비석도 있으며, 지붕돌을 씌운 비석도 있다. 그러나 이 신창척화비처럼 윗면이 편평하게 생긴 것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비석은 윗면을 편평하게 만드는 사례가 없으므로 이러한 비석은 씌워 놓았던 지붕돌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비석의 앞면에는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 주장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큰 글씨로 조각되어 있다.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라고 새겼다.
신창척화비는 높이 144㎝, 너비 41.4㎝, 두께 17.4㎝이다.
[금석문]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 주장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계아만년자손(戒我萬年子孫)[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작 신미립(丙寅作辛未立)[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현황]
척화비는 1882년의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의 철거 요구와 고종의 전교에 의해 전국적으로 철거 또는 매립되었다. 신창척화비가 ‘버려져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때 얕게 묻어 놓았는데 나중에 드러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의 비석 등을 한곳에 모아 세우는 과정에서 1969년에 신창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1987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신창척화비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창척화비는 전국에 30여 기만 남은 척화비 중 하나로,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다. 또한, 척화비가 설치되었던 1871년 당시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는 신창현(新昌縣)의 관아가 있는 치소였다. 내포 지방과 서울·경기 지방이 이어지는 길목으로, 충청수영로 등 주요 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음을 말해 주는 아산의 의미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