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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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宮事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성봉현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동에 있었던 온양행궁에 장헌세자가 다녀간 사실을 기록한 조선 후기의 책.
[개설]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진 장헌세자(莊獻世子)[1735~1762]가 각부습창(脚部濕瘡), 즉 다리의 습진을 온천욕으로 치유하기 위해 26세 때인 1760년(영조 36)에 영조의 허락을 받아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온천에 있던 온양행궁(溫陽行宮)에서 9박 10일간 머물다 갔다. 『온궁사실(溫宮事實)』은 1760년(영조 36) 7월 18일에 장헌세자가 창덕궁을 출발하여 온양행궁(溫陽行宮)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 4일 환궁하기까지 16일간의 과정을 1795년(정조 19)과 1796년(정조 20)에 걸쳐 자세히 기록하여 편찬한 필사본이다.
[제작 발급 경위]
『온궁사실』은 1760년 7월 18일부터 8월 4일까지의 16일 간 장헌세자가 피부염 치료를 위해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간 기록을 남기기 위해 승정원에서 편찬한 온행 기록이다. 장헌세자는 사망 직후 내려진 시호인 사도(思悼)로 불리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다. 정조는 장헌세자가 회갑이 되는 1795년(정조 19)에 아버지를 추모하며 온양군수와 충청감사에게 명을 내려 장헌세자가 활을 쏘았던 온양행궁의 사대(射臺)를 정비하게 하여 영괴대(靈槐臺)라 하였고 비를 세웠다.
[형태]
『온궁사실』은 3권 3책으로 편찬된 필사본이며, 사주단변(四周單邊)[지면의 네 둘레를 하나의 선으로 둘렀다는 의미]으로 되어 있다. 행자수(行字數)는 10행 20자이며, 어미는 상하향 사엽화문 어미(上下向四葉花紋魚尾)이고, 책은 오침장안(五針裝案), 즉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으로 제본되었다. 책의 규격은 가로 24㎝, 세로 38㎝이다.
[구성/내용]
『온궁사실』은 3권 3책으로, 권 1에는 「목록(目錄)」, 「대조연설(大朝筵說)」, 「소조연설(小朝筵說)」, 「전교(傳敎)」, 「하령(下令)」, 「계사(啓辭)」, 「달사(達辭)」, 「정원일기(政院日記)」[「제신사록(諸臣私錄)」, 「의주(儀註)」, 「절목(節目)」, 「군령(軍令)」, 「관첩(關牒)」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 2에는 「택일(擇日)」, 「도로(道路)」, 「척후복병(斥喉伏兵)」, 「배종(陪從)」, 「군병(軍兵)」, 「태복제무(太僕諸務)」, 「선창제무(船艙諸務)」, 「기전제무(畿甸諸務)」, 「호서제무(湖西諸務)」 등이 기록되어 있다. 권 3에는 「배설(排設)」, 「양료(量料)」, 「시사(試射)」, 「상전(賞典)」, 「영괴대사실(靈槐臺事實)」, 「온궁신정사적(溫宮神井事蹟)」이 수록되었다.
1. 권 1
「대조연설」은 1760년 7월 10일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 이후가 왕세자의 각부습창(脚部濕瘡) 치료를 위해 훈세(薰洗)가 유익하니 온욕(溫浴)이 마땅하다고 하여 온행(溫行)이 추진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온욕을 위하여 사도세자는 7월 18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과천(果川)·수원(水原)·직산(稷山)에서 유숙하고 7월 22일에 온양행궁에 도착하였다. 요양을 끝내고 8월 1일에 출발하여 직산·수원산성·과천을 거쳐 8월 4일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조가 취한 조처가 7월 10일부터 8월 6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소조연설」은 사도세자가 7월 10일부터 8월 4일까지 배행하였던 약방 관리들과 나눈 대화와 조처를 기록한 것이다. 「전교」는 영조가 세자의 온행 과정에 내린 각종 전교, 『계사』는 각조(各曹) 관리들이 세자 온행과 관련하여 올린 계문, 「달사」는 온행과 관련하여 각조의 관리들이 사도세자에게 보고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제신사록」은 사도세자를 배행(陪行)하였던 호조좌랑 서명서(徐命瑞), 무겸(武兼) 이화(李樺), 금군(禁軍) 신달하(申達夏), 경기감사 김문순(金文淳), 온양군수 변위진(卞緯鎭), 직산현감 조중진(趙重鎭) 등이 시행한 업무를 기록한 것이다.
「의주」는 온궁으로 출발하여 환궁할 때까지 각종 의식의 상세한 절차를 기록한 것이다. 「절목」은 병조에서 7월 18일에 왕세자가 온양의 온정(溫井)에 이를 때까지 시강원·익위사·분병조·분도총부 등의 업무 세칙을 기록한 것이다. 「선후상배위절차(先後廂陪衛節次)」는 금위영의 장관과 장교 등이 호위 절차를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군령」은 7월 19일부터 환궁하기까지 각 행궁에서 초취(初吹)·이취(二吹)·삼취(三吹)의 정확한 시각을 기록한 것이고, 「관첩」은 온행과 관련하여 관청 간에 주고받은 공문을 기록한 것이다.
2. 권 2
「택일」은 온궁으로 출발한 날짜와 목욕 날짜, 「도로」는 온궁까지의 각지 지명, 「척후복병」은 과천·광주·수원·진위·양성·직산·천안·온양 등 서울에서부터 온양까지 연결하는 봉수의 명칭과 소속 인원을 기록한 것이다. 「배종」은 온행을 배종한 신하들의 명단이며, 「군병」은 호위하였던 용호영(龍虎營)의 155명, 훈련도감(訓練都監)의 205명, 금위영(禁衛營)의 182명, 어영청(御營廳)의 207명, 수어청(守禦廳)의 51명 등의 명단을 기록한 것이다.
「태복제무」는 온행에 동원된 마필의 종류와 숫자, 「선창제무」는 동원된 선척(船隻)의 종류와 숫자 그리고 인력, 「기전제무」에는 경기관찰사가 사도세자의 온행으로 행하였던 장계(狀啓)·이문(移文) 등과 경기도에서 동원된 인원과 역할 등을 기록하였다. 「호서제무」는 사도세자의 온행과 관련하여 충청관찰사 구윤명(具允明)이 올린 장계·이문 등과 충청도에서 동원된 각종 관리의 역할을 기록한 것이다.
3. 권 3
「배설」은 온행에 필요한 모든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것이고, 「각색양료(各色粮料)」는 배종한 관리들과 인원, 하예(下隸)의 종류와 인원, 소요 마필 등과 그에 소요되는 미(米)와 태(太)의 소요량을 기록한 것이며, 「시사」는 배종하는 장교와 군사의 시사(試射)·유엽전(柳葉箭)·조총(鳥銃) 등에 대한 성적과 시상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상전」은 배종하였던 신하들에게 시행한 각종 포상을 기록한 것이다. 「영괴대사적(靈槐臺事蹟)」에는 맨 앞에 채색한 온천행궁도(溫泉行宮圖)와 영괴대도(靈槐臺圖)를 차례로 실었다. 이어서 영괴대의 대척수(臺尺數)와 건립 과정의 택일(擇日), 전교(傳敎), 연설(筵說), 장계(狀啓)[충청감사], 보첩(報牒), 비석재력(碑石財力), 비역후상전(碑役後賞典), 영괴대기(靈槐臺記), 비각개기제문유학조현대제(碑閣開基祭文幼學趙顯大製) 등을 수록하였다. 「온궁신정사적」은 온궁에 있는 신정(神井)의 사적에 관한 기록이다.
[의의와 평가]
『온궁사실』은 조선 후기 장헌세자의 온행과 관련된 절차, 여정, 동원된 인원, 물자 등 모든 사항을 기록해 놓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온행 과정은 물론이고, 특히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동에 있었던 온양행궁과 영괴대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온양행궁의 구조와 규모 등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며, 훗날 아산시의 숙원 사업인 온양행궁의 복원을 위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