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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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聖烈 |
영어공식명칭 | Lee Sungryul |
이칭/별칭 | 퇴암(退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만정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 이성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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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8년 - 이성렬 별시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8년 - 이성렬 홍문관응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0년~1894년 - 이성렬 규장각직각, 시강원문학, 증광문과 초시 시관, 이조정랑, 성균관대사성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1896년 - 이성렬 호남전운사, 진주부관찰사, 내각총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이성렬 혼전향관, 경상북도관찰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이성렬 중추원일등의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9년 - 이성렬 평리원재판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0년 - 이성렬 경효전제조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3년 - 이성렬 경상북도관찰사에서 전라북도관찰사로 전보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이성렬 궁내부특진관에 재임용 |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 이성렬 사망[추정]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이성렬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경기도 여주시 |
묘소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마곡2리 바누실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예안(禮安) |
대표 경력 | 성균관대사성|경상북도관찰사|궁내부특진관 |
[정의]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시기 충청남도 아산 지역 출신의 문신.
[개설]
1905년 을사늑약 후에 민종식(閔宗植), 이시영(李始榮) 등과 의병을 규합하기로 하고 군자금을 마련하였으나 의병 명부 압수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자 단식, 자결하였다.
[가계]
이성렬(李聖烈)[1865~?]의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호는 퇴암(退庵)이다. 외암(巍巖) 이간(李柬)의 6대손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출신이며 이상훈(李相勳)의 아들이지만, 이상유(李相逌)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1888년(고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관원이 되었으며,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지냈다. 1890년(고종 27) 이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증광문과(增廣文科) 초시(初試) 시관(試官), 이조정랑(吏曹正郞),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1894년(고종 31) 이후에는 호남전운사(湖南轉運使), 진주부관찰사(晉州府觀察使), 내각총서(內閣總書) 등으로 일하였다. 1896년(고종 33) 명성황후의 혼전향관(魂殿享官)에 임명되었고, 경상북도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 1898년(고종 35)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1899년(고종 36) 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 1900년(고종 37)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를 각각 역임하였다.
1903년(고종 40) 다시 경상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전라북도관찰사로 보직이 바뀌었으며, 여러 관직을 맡다가 1905년(고종 4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재임용되었다. 종2품으로서 같은 해 음력 3월 "기강 확립의 간언을 거부하면 직언하는 사람이 물러가고 간신이 활개를 치게 된다."는 상소를 올리고, 왕명으로 복제를 개정한 것에 반대한 최익현(崔益鉉)의 주장에 동조하여 최익현의 건의를 채용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의효전복제(懿孝殿服制)의 잘못을 논하고 3강(綱) 13목(目)의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으로부터 창의구국(倡義救國)으로 거사하자는 편지를 받았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경기도 여주에 은거하며 민종식, 이시영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규합하기로 하고 군자금을 담당하였다.
군자금 마련은 전답 400여 석분을 방매(放賣)하고 충청남도 아산의 외암마을 집까지 급히 헐값에 팔았다고 전해진다. 외암마을 집은 현재 ‘교수댁(敎授宅)’으로 불리는 집이라고 하며, 같은 집안의 이백선(李伯善) 또는 이백선의 양부 이용구((李用龜)에게 팔았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밀고한 자가 있어 일본군에게 의명 병부를 압수당하여 많은 의병이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사망한 해는 1907년으로 추정되며, 이성렬 집안은 가세가 크게 기울어 후손이 심한 고초를 겪으며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묘소]
생부 쪽이든 양부 쪽이든 선대의 묘는 모두 송악면을 중심으로 아산시에 있으며,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와의 합장묘는 송악면 마곡2리 바누실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