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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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文獻 |
영어공식명칭 | Old Document |
이칭/별칭 | 고전적,고문서,고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집필자 | 정은영 |
[정의]
경상북도 청송 지역과 관련된 1945년 이전 편찬된 기록 자료와 서적.
[개설]
오늘날 청송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청송과 진보로 나뉘어 있었다. 청송은 고려 성종대에 청부현(靑鳧縣)으로 고친 이래, 1394년 청보현(靑寶縣)으로 개칭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소헌왕후의 친정 고향인 청보현을 인근 진보현과 합쳐서 청보군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1424년(세종 5)에 다시 행정상의 불편을 이유로 진보현을 분리하고, 송생현(松生縣)과 합치게 되었다. 이때 ‘청보’의 ‘청’과 ‘송생’의 ‘송’을 합쳐서 현재의 명칭인 청송군(靑松郡)으로 부르게 되었다.
1459년(세조 5)에는 어머니 소헌왕후를 각별히 생각하였던 세조의 명으로 청송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청송도호부는 1895년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청송군으로 다시 환원되었으며, 진보현은 1424년 분리된 이래로 현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1895년 진보군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현전하는 읍지(邑誌)와 지리지(地理志) 등에 전해지며, 고지도(古地圖)에는 청송과 진보의 읍치와 면리, 지형 및 군사 시설 등을 간략히 기술하고 있다.
15세기 초반에 제작된『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청송군은 지리적으로는 서쪽으로 안동의 임하에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속현인 안덕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신령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진보의 파질부곡과 접해 있었다. 진보현은 안동 임하와 영덕, 영양에 접해 있었다. 또한 청송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는 심(沈), 김(金), 전(全), 장(蔣), 신(申)씨이고, 송생(松生)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는 윤(尹), 노(盧), 전(全)씨이며, 내성(來姓)으로 전(全), 박(朴), 이(李)씨, 촌성으로는 정(鄭)씨가 있었다. 속현인 안덕(安德)에는 김(金), 이(李), 손(孫), 전(全), 장(蔣)씨가 있었다. 진보에는 조(趙), 이(李), 김(金), 박(朴), 백(白)씨 이외에도 속성(續姓)으로 전(全)씨와 춘감과 파질부곡에 오(吳)씨가 있었다.
19세기 말에 작성된 청송군과 진보군 읍지를 참고하면 이들 성씨 가운데 청송군은 심, 김, 전, 장, 신씨가, 송생에는 윤, 노, 전(全), 정(鄭), 김(金), 박(朴), 이(李)씨, 안덕에는 김, 이, 손, 전, 설(薛), 장(蔣), 조(趙), 권(權), 신(申), 남(南), 서(徐)씨가 확인된다. 한편 진보에는 조, 김, 박, 백, 전씨가 본관을 삼고 있으며, 이 외에 춘감오씨(春甘吳氏), 안동권씨(安東權氏), 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 영해신씨(寧海申氏), 죽산안씨(竹山安氏), 동래정씨(東萊鄭氏), 연안이씨(延安李氏), 월성이씨(月城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춘천박씨(春川朴氏), 전주최씨(全州崔氏), 의령남씨(宜寧南氏), 영양남씨(英陽南氏), 단양우씨(丹陽禹氏) 등이 확인된다.
기존의 성씨들 가운데 진보의 속성인 전씨와 파질부곡의 오씨들이 사라진 반면 새롭게 편입된 성씨들이 다수 확인된다. 이처럼 새로운 성씨의 확대는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의 경우에는 더욱 다양한 성씨들의 이주가 확인된다. 그것은 조선 후기 영남학파를 주도하였던 안동과 영해에 인접해 있고 전란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기 때문에, 17세기 이래로 이곳으로 이주해 온 가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가문에 전승되어 오던 고문서와 전적, 책판 등은 청송 지역 인물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송의 고지도 및 지리지]
청송과 진보를 서술한 지리지류와 읍지류에는 1425년(세종 7)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1454년(단종 2)의 『세종실록지리지』, 1469년(예종 1)의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1530년(중종 25)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조대의 『여지도서(輿地圖書)』, 정조 연간의 『진보현읍지(眞寶縣邑誌)』, 『청송부읍지(靑松府邑誌)』, 19세기 초에 작성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19세기 말에 작성된 『영남읍지(嶺南邑誌)』, 그 뒤를 이어서 1899년(광무 3)의 『경상북도 청송군 읍지(慶尙北道靑松郡邑誌)』와 『경상북도 진보군 읍지(慶尙北道眞寶郡邑誌)』가 있다. 20세기 초반의 일제강점기에는 1929년의 『청송세고(靑松世考)』, 1936년의 『청기지(靑己誌)』, 1937년의 『청송군지(靑松郡誌)』, 『교남지(嶠南誌)』 등이 있다. 여기에는 연혁과 지명 변화, 관청 및 성씨, 향교, 서원, 인물 등의 인문 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어서 당대에는 지방 통치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고지도(古地圖)에는 18세기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안동도회 좌통지도(安東都會左通地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영남지도(嶺南地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와 19세기 이후 제작된 『청구도(靑邱圖)』, 『청구요람(靑邱要覽)』, 『지방지도(地方地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광여도(廣輿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1872년 지방지도』「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팔도지도(八道地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지승(地乘)』「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조선지도(朝鮮地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해동지도(海東地圖)』「청송도호부·진보현 지도」 등이 확인된다.
18세기 초반 이래로 채색 지도가 만들어지면서 청송과 진보의 지도 역시 산천 형세, 면리의 명칭과 위치, 관아와 주요 도로, 역원, 봉수, 사찰, 서원 등을 채색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외에도 『지승』, 『광여도』 등은 원호와 인구수, 군정, 전답 결수와 내역을 상세히 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 지도가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청송 지역의 문집과 일기]
청송 지역 출신이거나 활동한 인물들이 남긴 문집에는 장팔국(蔣八國)[1562~1633]의 『귀래정유집(歸來亭遺集)』[2권 1책]과 안덕 출신인 조형도(趙亨道)[1567~1637]의 『동계문집(東溪文集)』[5권 3책], 조준도(趙遵道)[1576~1665]의 『방호문집(方壺文集)』[5권 2책], 신즙(申楫)[1580~1630]의 『하음문집(河陰文集)』[9권 5책], 권렴(權濂)[1701~1781]의 『후암문집(厚庵文集)』[8권 4책], 권이복(權以復)[1740~ 1819]의 『만주집(晩洲集)』[4권 2책], 황학(黃㶅)[1758~1804]의 『만취동일고(晩翠洞逸稿)』[2권 1책], 서활(徐活)[1761~1838]의 『매야문집(邁埜文集)』, 민종혁(閔宗爀)[1762~1838]의 『죽소문집(竹巢文集)』[2권 1책], 조기영(趙基永)[?~1841]의 『현은문집(玄隱文集)』[4권 2책], 황윤중(黃允中)[1782~1855]의 『운학집(雲鶴集)』[2권 1책], 신필흠(申弼欽)[1806~1866]의 『천재문집(泉齋文集)』[8권 4책], 민치긍(閔致兢)[1810~ 1885]의 『현암문집(玄嵒文集)』[2권 1책], 심성지(沈誠之)[1831~1904]의 『소류집(小流集)』[4권 2책], 서효원(徐孝源)[1839~1897]의 『석간문집(石澗文集)』[8권 4책], 조독호(趙篤祜)[1841~1924]의 『회간문집(晦澗文集)』[4권 2책] 등이 있다.
청송에 우거한 인물의 문집으로는 박성(朴惺)[1549~1606]의 『대암집(大庵集)』[6권 4책]과 안동에서 우거해 와서 많은 제자를 양성한 유치구(柳致球)[1793~1854]의 『소은집(小隱集)』[4권 2책]이 있다. 또한 1895년 각지에 창의격문을 보냈던 유응목(柳膺睦)[1841~1921]의 『학산집(鶴山集)』[12권 6책] 등이 있다.
성리학적 학술 저서로는 권렴이 경학에 관한 이론서로 지은 『명성집람(明誠集覽)』[7권 2책]이 1813년 청송 부동면[현 주왕산면] 마평서당(馬坪書堂)에서 간행되었다. 1909년 청송 부동면[현 주왕산면] 부강서당(鳧江書堂)에서는 대산 이상정(李象靖)이 심학(心學)의 중요한 과제를 해설한 책인『약중편(約中編)』과 천사 김종덕(金宗德)이 성학의 바른 길을 제시한 글인 『성학정로(聖學正路)』, 정재 유치명(柳致明)이 편찬한 『주절휘요(朱節彙要)』를 간행하였다. 이 외에도 서활이 경전에 나오는 구용(九容), 구사(九思)를 18장으로 나누고, 고금의 격훈(格訓)을 각 장별로 붙여서 만든 『용사집설(容思集說)』이 있다. 또한 김문희(金文熙)가 대학과 중용에서 논란이 있거나 의문이 나는 부분에 대하여 우리나라 선유들의 학설을 모아 조목별로 엮은 『학용요의집록(學庸要義輯錄)』[7권 3책], 조독호가 주희·이황·이언적·이상정의 각 문집·혹문·집주·연의·언행록·실기 등에서 중요한 부분을 편집해 편찬한 『독서찬요(讀書纂要)』[14권 2책], 방호정(方壺亭)에서 1914년 단종의 사적에 대한 내용을 모아 만든 『장릉사보(莊陵史補)』[6권 3책] 등이 있다.
『적원일기(赤猿日記)』는 1896년 청송지역 의병들의 항쟁 경과를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심성지를 대장으로 하는 청송 의병진의 참모들과 서기들이 차례로 집필한 진중일기이다. 단순한 개인 일기가 아니라 의병진 참모와 서기의 자격으로 쓴 의병 진중일기라는 점에서 가치를 더한다. 당시 의병 대장이었던 심성지 후손가에 전해져 오다가 지난 1996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안동·영양·의성에서 의병 항쟁이 이어지자, 청송지역 선비들도 파천면에 거주하던 청송심씨 문중의 심성지를 대장으로 천거하고, 청송군 객사에 지휘부를 두었다.
[청송 지역의 고문서류]
청송 지역의 고문서로는 「진보군관둔전답자호복수두락구별성책(眞寶郡官屯田畓字號卜數斗落區別成冊)」, 밀양박씨 돈와공파 소장 고문서(密陽朴氏敦窩公派所藏古文書), 원주이씨 판도공파 소장 고문서(原州李氏版圖公派所藏古文書), 파평윤씨 소정공파 소장 고문서(坡平尹氏昭靖公波所藏古文書), 청송심씨 현감공파 소장 고문서(靑松沈氏縣監公派所藏古文書), 평해황씨 부사공파 소장 고문서(平海黃氏府使公派所藏古文書), 청송민속박물관 소장 고문서(靑松民俗博物館所藏古文書), 계미년 진보향교회 통문(癸未年眞寶鄕校會通文), 1439년 진보현감 첩정(1439年 眞寶縣監牒呈), 무술년 청송도호부 차사첩(戊戌年靑松都護府差使帖), 무술년 청송부 서목(戊戌年靑松府書目), 1838년 청송도호부 첩정(1838年 靑松都護府牒呈), 1838년 경상도 서목(1838年 慶尙道書目), 1841년 경상도 첩정(1841年 慶尙道牒呈), 1843년 송학서원 통문(1843年 松鶴書院通文), 기곡재사 소장 고전적(崎谷齋舍所藏古典籍), 김한계 조사 문서(金漢啓朝謝文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의성김씨 목사공파 천현 종중의 김한계 조사 문서는 2017년 4월 26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2호로 지정되었다.
[청송 지역의 책판]
청송의 책판으로는 청송군 부동면[현 주왕산면] 상평리 달성서씨 석간 종택에 『석간집(石澗集)』, 『약중편』, 『성학정로』, 『주절휘요』, 『용사집설』, 『매야집』 책판 350장이 있다. 안동권씨 급사중공파 후암 종중에는 『후암집』, 『명성집람』,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책판 159장이 있다. 의성김씨 도곡공파에는 『학용요의집록』 책판 131장이 있으며, 함안조씨 방호공파에는 『독서찬요』, 『장릉사보』, 『회간문집』 책판 235장이 있다.
방호정에는 『방호선생문집』, 『면류재문집(面柳齋文集)』, 『파산세록(巴山世錄)』, 『현애세고(玄厓世稿)』, 『현은집』 등 346장이 있으며, 파평윤씨 소정공파의 영모재에는 『순절록(殉節錄)』 책판 19장이 있다. 『순절록』은 윤경환(尹景煥)이 지은 것으로 『병자순절록(丙子殉節錄)』이라고도 부르며, 병자호란 당시 쌍령(雙嶺)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의사(義士)들에 대한 기록이다. 단권으로 「습유(拾遺)」, 「실기(實紀)」, 「부록(附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기」에는 「상렬사상량문(尙烈祠上樑文)」과 「상렬사봉안문(尙烈祠奉安文)」, 청송 열사의 사당인 국계사(菊溪社)를 중수하며 지은 「국계사중수기(菊溪社重修記)」 등이 실려 있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에는 『예주세록(禮州世錄)』, 『천재문집』 책판 360장이 남아 있으며, 평해황씨 부사공파 화전 문중에는 『만취동일고』 책판 34장이 있다. 청송민속박물관에는 『청기세고(靑己世稿)』 책판 54장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책판 가운데 석간 종택과 후암 종중, 평산신씨 판사공파, 평해황씨 소장 책판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