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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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三道 |
영어공식명칭 | Kim Samd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삼도(金三道)[1900~1967]는 1900년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후암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와 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은 당시 계성학교 6학년이었던 김삼도를 비롯한 심문태(沈文泰)·정원조(鄭元祚)·박태현(朴泰鉉)·이승욱(李陞旭)·손석봉(孫石鳳)·최영학(崔永學)·김재범(金在範)·이영식(李永植)·이성용(李聖容)·박재곤(朴在坤) 등의 학생을 소집하여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김삼도는 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으며, 다른 학생들에게 참여를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8일 김삼도를 비롯한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은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김삼도도 이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삼도는 1967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삼도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