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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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範 |
영어공식명칭 | Heo Beo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허범(許範)[?~?]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대구에서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白南採)·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8일에 만세 시위를 열기로 결의하고 준비하였다.
허범은 당시 자신의 집인 대남여관(大南旅館)에서 하숙하고 있던 최상원으로부터 만세 시위 참여를 권유받고 함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신현욱(申鉉旭)·백기만(白基萬)·하윤실(河允實)·김수천(金洙千)·김재소(金在炘)·박노일(朴魯一) 등과 함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시위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8일 허범을 비롯한 200여 명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서문시장 근처로 집결하였다. 오후 3시가 되자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 성경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허범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어 출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