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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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章鎬 |
영어공식명칭 | Park Jang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장호(朴章鎬)[1886~1961]는 1886년 8월 29일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성경학교(聖經學校) 강습생으로 있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白南採)·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열기로 계획하였고, 박장호를 비롯한 성경학교 강습생들도 참여를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8일 박장호는 성경학교 강습생 2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으로 집결하였고, 오후 3시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박장호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장호는 1961년 7월 29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장호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