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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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再祐 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산2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의 묘비.
[개설]
곽재우[1552~1617]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천리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큰 공을 세웠고,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귀향하여 낙동강 변에 망우당(忘憂堂)을 짓고 수학하면서 조용히 생애를 마쳤다.
[건립 경위]
묘비는 비문에 의하면, “나의 장례는 예법대로 치르지도 말고 겨우 흙이 덮일 정도로 묻는데서 그치며, 봉분도 만들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는 곽재우의 유언에 따라 건립되지 않다가 1732년(영조 8)에 세워졌다.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사무소를 지나 남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에 현풍 곽씨 묘역이 나타난다. 곽재우의 묘는 묘역의 중앙 상단부에 위치하며, 묘비는 묘 앞에 있다.
[형태]
곽재우 묘비는 비좌 위에 원수형(圓首形)의 비신을 세웠다. 비좌는 매몰되어 일부만 노출되어 있다. 비좌 길이 91㎝이고, 비신 높이 132㎝, 너비 50㎝, 두께 17.5㎝이다.
[금석문]
1732년에 세워진 비의 앞면에는 '증 병조 판서 행함경도 관찰사 망우당 선생 곽 충익공 묘(贈兵曹判書行咸鏡道觀察使忘憂堂先生郭忠翼公墓)/정부인 상산 김씨 부(貞夫人商山金氏祔)'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장자 통덕랑 형 묘재계하십보내(長子通德郞瀅墓在階下十步內)'라 쓰여 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조문명(趙文命)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이덕수(李德壽)이다.
비의 뒷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망우당 곽 선생은 임진년 섬 오랑캐들의 변란을 당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영남에서 적군을 격파함에 그 전공(戰功)은 매우 특수하였으며, 만년(晩年)에 관직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솔잎을 복용하며 음식을 들지 않았으니 그 행적 또한 매우 기이했도다. 부엌지기 천비(賤婢)들과 꼴을 베는 머슴들까지도 다 선생의 이름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람 공몽양(龔夢暘)은 일찍이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와 일컫되 ‘공의 사적과 공로는 옛날에도 없었던 희귀하고 기특한 일이었으니 우리 중국에서도 공의 이름을 듣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명성은 진실로 천하에 전파되었도다.
선생에 관한 일을 담론하는 사람들은 말만하면 반드시 특이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조남명(曺南冥)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니, 몸을 던져 국난(國難)에 뛰어들었음은 일시적인 강개지심(慷槪之心)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었다. 만년에 병을 이유로 절개를 지키고, 덕(德)을 검소하게 하여 혼란을 피하는 의리를 보여 주고 있음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남다른 행동을 즐겨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도다.
선생의 묘소는 현풍의 구지산에 있으니, 선생은 일찍이 유언을 하되 ‘임진·계사년의 왜란으로 인해 선왕(先王)의 두 능(陵)이 훼손되고 구묘(九廟)가 불탔으니 신하의 치욕이 막대하도다. 때문에 나의 장례는 장례의 예법대로 치르지도 말고 겨우 흙이 덮일 정도로 묻는데서 그치며, 봉분도 만들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 나의 뜻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백여 년이 지났는데도 감히 봉분을 증축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우인(李友仁) 공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상공(相公)의 후손이다. 이 현풍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먼저 선생의 묘를 배알, 두루 둘러보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봉분을 감히 더 높이지 못함은 진실로 선생의 유지(遺志)를 따름이라 하겠으나 묘소에 묘표(墓表)마저 없다면 뒷날 사람들이 어찌 능히 선생의 분묘임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다 ‘그렇다!’고 말하면서 드디어 현 감사(監司) 조현명(趙顯命) 공에게 그 사실을 아룀에 조공이 그 말을 듣고 즉시 재물을 염출(捻出)하여 비석을 마련함과 아울러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그 일을 위해 글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선생의 관직·문벌·사적 등은 뒷날 마땅히 신도비(神道碑)의 기록이 있을 터이니 지금은 다만 선생의 분묘를 표시하는 까닭의 뜻만 기록하노라. 선생의 휘(諱)는 재우(再祐)요, 자(字)는 계유(季綏)며 포산(苞山) 사람이니, 가정(嘉靖) 임자년(壬子年)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에 별세하였다. 관직은 관찰사(觀察使)와 증병조 판서(贈兵曹判書)였다. 이로써 표문(表文)을 삼는다.
가선대부 행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이덕수 찬/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사 풍릉부원군 수충갈성결기분무공신 조문명 서/숭정 기원후 일백오년 임자 월 일립[忘憂堂郭先生當壬辰島夷之変首起義兵擊賊於嶺南其功甚奇晩又棄官入山餐松辟穀其迹又甚/奇不唯爨婢蕘竪皆知先生名中朝人龔夢暘甞抵先生書云翁之事功振古稀奇吾中華莫不聞知若/然者先生之名固已播於天下矣世之談先生者動必以異人稱之然不知先生早遊曺南溟之門得聞/性理之說其挺身赴國難非出於一時之慷慨而晩節謝病又有見於儉德辟難之義非故喜爲驚世絶/俗之行而然也先生之墓在玄風縣仇知山盖先生甞有遺命曰龍蛇之変 先王二陵夷九廟火臣子/之恥辱大矣吾葬不用成禮揜坎而止不封不樹無違吾志至今百有餘年之間不敢輒事增築李侯友/
仁漢陰相公之後孫也來守是邦首謁先生墓周覽咨嗟以爲土不敢加固所以遵先生志墓而無識後/之人又奚能知其爲先生墓也於是邑之章甫皆曰然遂以告於今按使趙公顯命趙公聞卽捐財伐石/走書於德壽俾爲之記若先生官閥事蹟後當有神道之銘今只書所以識先生墓之意先生諱再祐字/季綏苞山人生於嘉靖壬子卒於萬曆丁巳官至觀察使 贈兵曺判書是爲表
嘉善大夫行兵曺叅判兼同知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李德壽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豐陵府院君輸忠竭誠决幾奮武功臣 趙文命書/崇禎紀元後一百五年壬子 月 日立]"
[현황]
비는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으나, 뒷면의 비문을 판독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의의와 평가]
곽재우 묘비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기초 자료이며, 후세들에게 곽재우의 나라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교육 현장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