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626 |
---|---|
한자 | 秋適 神道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2길 26[본리리 730]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 서원에 있는 조선 후기 추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개설]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으로 민부 상서(民部尙書), 예문관 제학(提學)을 지냈고,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하였다고 하는 추계 추씨(秋溪秋氏)의 시조 추적(秋適)의 신도비이다. 추적은 생몰년은 미상이며, 호는 노당(露堂)이다. 충렬왕 초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랐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인 합덕 부곡(合德部曲)[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그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에 투옥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시랑으로서 북계 용주(龍州)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安珦)에 의하여 발탁되어 이성(李晟), 최원충(崔元冲) 등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 혹은 생원들에 대한 유학 교육을 담당하였다. 민부 상서, 예문관 제학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현재 인흥 서원에 추황(秋篁)·추유(秋濡)·추수경(秋水鏡)과 함께 배향되고 있다.
[위치와 현황]
추적 신도비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2길 26에 위치한 인흥 서원에 세워져 있다. 인흥 서원의 외삼문 오른쪽의 단칸 팔작지붕의 비각 안에 위치한다. 1864년(고종 1)에 건립되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비문도 육안으로 판독이 가능하다.
[형태]
비는 귀부 위에 비신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형태이며, 특이하게도 옥개석 아랫면 전체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귀부는 하부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규모는 귀부 높이 20㎝, 너비 108㎝이고, 비신 높이 210㎝, 너비 83㎝, 두께 56㎝이다.
[금석문]
전면 상부에는 '고려 평장사(高麗平章事)', 왼쪽 면 상부에는 '노당(露堂)', 뒷면 상부에는 '추선생신도(秋先生神道)', 오른쪽 면 상부에는 '비명(碑銘)'이라고 쓰여 있다. 비의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고려 평장사 노당 추선생 신도비명 병서, 정헌대부 예조 판서 홍문관 제학 경연 일강관 동양 신석우 삼가 짓고, 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원임 규장각 직각 영가김덕근 삼가 쓰고, 통훈대부 행홍문관 응교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실록 편수관 기계유초환 삼가 전액하다.
노당 추 선생의 휘는 적이요, 자는 관중이니 고려충렬왕 때의 분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공은 성품이 활달하여 검속이 없고, 과거에 올라 안동 서기에 뽑혔고, 직사관에 선임되었으며 여러 차례 옮겨서 좌사간이 되었고 엄인들의 아첨에도 공은 동요하지 않았으며 벼슬이 민부 상서,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을 때 사직을 하셨다고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손님을 대접하려면 부드럽게 쌀밥을 짓고 생선을 잘라서 국을 끓이면 적당할 것이니 하필이면 많은 돈을 낭비해서 진수성찬을 갖추어야 되느냐고 하였다.
역옹 이제현은 말하기를 국가에 전쟁이 일어난 지 거의 이십 년이 되어 육경의 학문이 실오라기처럼 끊이지 않고 전해 오다가 문성공 안유 선생이 정승이 되었을 때 국학을 짓고 학당을 수리하여 이성과 추적, 최원충 등을 천거하여 한 가지 경서를 가르치는 곳에 교수 두 명씩을 두게 하니 이때부터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경학에 능통하고 고문을 넓게 공부하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또 추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공의 조부이신 휘 엽이 송나라 고종 때[高麗平章事露堂秋先生神道碑銘竝書 正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 慶筵日講官東陽申錫愚謹纂 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 慶筵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原任 奎章閣直閣永嘉 金德根謹書 通訓大夫行弘文館應敎知製 敎兼 慶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實錄編修官杞溪兪初煥謹篆 露堂秋先生諱適字慣中高麗 忠烈王朝入按史稱公性豁達無檢束登科調安東書記選直史館屢遷左司諫爲閹人所讚公不爲動官至民部尙書藝文館提學致仕常言享客但軟炊白粒割鮮作羹可矣何必費 百金致八珍耶櫟翁李齊賢曰國家用兵幾二十年六籍之傳不絶如線 安文成爲宰相葺國學修庠序擧李晟秋適崔元沖等一經置兩敎授於是縫掖薦紳之徒多以通經博古爲事又按秋氏譜公祖諱饁宋高宗時]"
이어지는 왼쪽 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로 왔고 2대를 지나 공에 이르니 고려 고종 33년 병오생으로 원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충숙왕 4년 7월 7일에 졸하니 향년 72세였다. 저서로는 『명심보감』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학문의 연원은 죽계 안유 선생에게 수학했으며, 그 역임한 벼슬은 충선왕조에 문하시중에 제수되었고, 밀성백에 봉해졌으며, 식읍을 주고 문헌공으로 시호를 추증했다. 그 후계를 말하자면 공의 아들은 진이요, 손자는 유인데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으나 명나라가 개국하던 초기였다. 후손 수경에 이르러서 다시 우리나라로 왔는데, 임진왜란에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나올 때였다. 마침내 우리나라에 살게 된 것인데, 그 본관을[自中國徒居海東歷二世至公以高麗 高宗三十三年丙午生 元宗元年庚申登文科 忠肅王四年丁巳七月七日卒享年七十二所著有明心寶鑑其學問則曰受學于竹溪先生安裕其官爵則曰 忠宣朝召拜門下侍中封密城伯與食邑 贈諡文憲其後系則曰公子震孫濡還入中華値皇明開國之初至後孫水鏡還出東國爲壬辰東授時遂居于東其貫籍]"
다음은 이어지는 뒷면의 내용이다. “밀성, 경산, 영순, 추계 등으로 써왔던 것은 대개 자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됨으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국문헌비고』 「씨족고」를 살펴보면 공의 본관을 추계로 하였은즉, 대개 공의 후손들도 추계로 본관을 써 온 지가 오래 되었다고 보겠다. 공이 별세하고 평안도 용천부에 사당을 세웠으며, 묘소는 경상도 화원현에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되었다가 철종 4년 계축년[1853년]에 비로소 대구부 인흥방 오좌에 장례되었음을 알았으니 화원은 후대에 와서 대구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자손들은 이에 묘역을 보수 치분하여 그 아래 재실을 짓고 분향을 올렸으며, 또 신도비를 세우게 됨에 선생의 후손 세문 등이 기적비문을 나에게 부탁하므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전해 온 역사와 가승보에서 기록을 모아 증거로 믿을 만한 사실을 뽑아 비문을 찬하고 이어서 비명을 쓰노니 명하기를,
고려 시대 이름 높은 석학 계셨으니 이르기를 노당 선생이시네/ 정도를 지키고 아첨하지 않았으며 저 내시들을 물리치셨네/ 학문을 주창하여 도를 지키었으니 국가의 큰 영광이로다/ 벼슬이 높고 명예를 떨친 후 노년에 돌아와 배회하도다/ 쌀밥 짓고 생선국 끓여 아름다운 손님을 들게 하셨네/ 선조를 계승하여 그 후예들도 중국의 조정에 크게 명성을 날렸네/ 그 빛을 간직하여 후손에게 드리워서 동방에서도 빼어난 가문 되었네/ 당대에도 도학을 선창하여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 남기셨네/ 번창한 땅 이 아름다운 대구에 오랫동안 묻혀 있다 다시 나타나셨네/ 옥돌에 그 사적을 기록해 두고 영원히 후세에 잊지 않으리라.[則曰密城曰慶山曰永順曰秋溪盖因子孫之散居焉按東國文獻氏族考公之貫謂之秋溪則凡爲公之後者以秋溪爲籍舊矣公之沒立祠于平安道之龍川府墓在慶尙道花園縣歲久失傳哲宗癸丑始得其藏於大邱府之仁興坊坐午之原花園後屬大邱故也 子孫於是修塋域構齋舍以薦芬苾將竪麗牲之石公之後孫世文等來請紀蹟之文于錫愚辭不獲遂綴史傳家牒之可徵信者爲文系之以銘銘曰 麗世名碩曰有露堂守正不阿斥彼貂璫倡學衛道邦國之光宦成名遂/歸老徜徉炊粒割鮮賓嘉是嘗先系後裔函夏夬兩胚光垂裕挺于東方/克倡厥躬竹帛流芳鬱鬱佳城久晦而章貞珉紀蹟永世可忘]"
오른쪽 면에는 “숭정 기원후 네 번째 갑자년[1864년] 팔월[崇禎紀元後四甲子仲秋]”이라 적혀 있다.
[의의와 평가]
추적 신도비는 인흥 서원과 인흥 서원에 보관 중인 『명심보감』 판본[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7호]과 함께 추적의 생애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