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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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栗里 |
영어음역 | Ogyul-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옥율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20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노옥(老玉)의 ‘옥(玉)’자와 율리(栗里)의 ‘율(栗)’자를 따서 옥율동(玉栗洞)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천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20년 노옥·율리가 통합되어 김천군 아천면 옥율동으로 개편되었다.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통합하여 신설된 어모면 관할이 되었고 1949년 금릉군 어모면 옥율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옥율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어모면 옥율리가 되었다.
[현황]
옥율리는 어모면 소재지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약 1㎞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5.63㎢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52세대에 366명(남자 190명, 여자 17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중왕리, 서쪽으로 문암산을 사이에 두고 문당동, 남쪽으로 남산리, 북쪽으로 동좌리·은기리와 이웃하고 있다. 옥율1리·옥율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김해 김씨와 진양 강씨 집성촌이다. 복숭아를 비롯한 과수 재배 면적이 넓고 최근에는 양계와 젖소 사육 농가가 크게 늘어났다.
문화 유적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1호인 금릉 옥률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효자 강우창 정려각이 있다. 강우창(姜遇昌)은 광해군 때 이름난 효자로 부친이 병들자 인분(人糞)을 맛보아 병의 경중을 헤아리고, 병세가 위중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시묘를 하면서 얼마나 통곡을 했던지 산소의 흙이 눈물에 절어 짜고 무릎을 구부린 지점에 깊은 구멍이 생겼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강우창이 세상을 떠나고 200년 뒤인 1862년(철종 13)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자연 마을로는 노리기, 율리, 자랑내, 대밭양지 등이 있다. 노리기는 나이가 많은 강씨 노인이 사는 마을이란 뜻으로 ‘늙을 노(老)’자와 ‘여윌 리(羸)’자를 따서 노리(老羸)라 부르던 것이 변음이 되어 굳어진 이름이다. 강노옥(姜老玉)이란 노인이 장수하며 마을에 살았다 하여 노옥이라고도 한다. 1654년 진양 강씨 강선태(姜善泰)가 충청도 연기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고, 1729년 정선 전씨 전택룡(全澤龍), 1746년 밀양 박씨 박광로(朴光老), 1819년 김해 김씨 김태식(金泰植) 일가가 차례로 입향한 이래 진양 강씨와 김해 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율리는 김율(金栗)이란 사람이 살면서 주변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붙인 이름이다. 밤을 줍는 골짜기란 뜻에서 밤주골이라고도 한다. 노리기에서 내려오다가 현재 공사가 중단된 보건대학 뒤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630년 김해 김씨 김응호(金應昊)가 상주에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1907년 성산 전씨 전기장(全基張)이 상남에서 입향하였다.
자랑내는 율리와 노리기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이 합수되어 형성된 자랑내[일명 긍천(矜川)] 냇가에 자리 잡은 마을이므로 붙인 이름이다. 자랑내는 효자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마을의 냇가라는 뜻이다. 대밭양지는 옥율리에 속하는 마을 중 가장 바깥쪽 도로변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민가가 없는 대나무 밭이었는데 1950년 이갈산(李葛山)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