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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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義里 |
영어음역 | Inui-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373년(공민왕 22) 부성부원군(富城府院君) 서산 정씨 정윤홍(鄭允弘)이 봉계(鳳溪)로 옮겨 오면서 다섯 아들 정사인(鄭斯仁)·정사의(鄭斯義)·정사예(鄭斯禮)·정사지(鄭斯智)·정사신(鄭斯信)의 이름 끝 자를 각각 따서 인의리, 예지리, 신리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파미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중리·직동(直洞)이 통합되어 김천군 봉산면 인의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봉산면 인의동이 되었다. 1971년 인의1동·인의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인의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북쪽에 문암산, 북쪽에 극락산이 솟아 있고 봉계천이 흐른다. 극락산과 문암산 사이로 한참 더 들어가면 큰골[大谷]로 불리는 깊은 골짜기에 큰골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둑 바로 앞에는 말굽과 비슷한 자국이 선명한 장군바위가 있다. 주민들은 봉계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장군바위의 정기를 받아 예부터 봉계에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믿는다.
[현황]
인의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10.09㎢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74세대에 410명(남자 218명, 여자 19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삼락동, 서쪽으로 예지리·상금리, 남쪽으로 신리, 북쪽으로 어모면 은기리와 이웃하고 있다. 인의1리·인의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창녕 조씨·연일 정씨 집성촌이다. 봉계천 주변에 형성된 농경지에서 포도 재배가 이루어져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1호로 매계 조위(曺偉)를 기리기 위한 사당 김천 율수재(律修齋)가 있다. 1980년부터 매년 김천문화원 주관으로 매계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인의리는 고려 공민왕 때에 서산 정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명문가로 명성을 떨치었으나 언제인가 대부분 타처로 떠났는데, 이와 관련하여 분통골의 유명한 전설이 전해 온다. 마을 북쪽 극락산 자락에 공민왕 때 정윤홍이 입향해 살다가 세상을 떠나자 풍수가 분통골에 묏자리를 잡아 주며 관을 열한 개 묻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볍게 들은 자손들이 한 개쯤 덜 묻으면 어떠랴 하고 열 개만 묻었다.
이후 서산 정씨 가문이 대대로 번창하자 이를 경계한 조정에서 부성부원군의 묏자리가 명당인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묘를 파도록 하였다. 묘를 파니 연이어 아홉 개의 빈 관이 나왔고, 지친 관리들이 포기하려다 마지막 한 개만 더 파 보자 하여 열 개째 관을 열어 보니 뽀얀 김이 서리며 학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이후 서산 정씨 집안은 차츰 쇠락해져 타처로 이주해 갔다고 한다. 당초에 풍수가 시키는 대로 열한 개를 모두 묻었더라면 진짜 관은 보존되고 명당의 음덕을 입은 집안도 계속 번창했을 것이라며, 관 한 개를 더 묻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하여 이 골짜기를 분통골이라 부른다고 전해 온다.
서산 정씨와 비슷한 시기에 창녕 조씨 조심(曺深)이 입향하여 창녕 조씨 집성촌을 이룬 이래 조위·조신(曺伸) 등 당대의 걸출한 문장가를 배출하였다. 인의2리에 속하는 직동은 창녕 조씨와 연일 정씨 집성촌으로 조선 숙종 때 통훈대부 정만용(鄭萬容)이 둘째 아들인 파계(巴溪) 정낭수(鄭郎洙)를 봉계 가장 윗마을로 분가시켰는데 인의에서 곧장 올라가서 터를 잡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달리 상리(上里), 곧은네골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