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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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抗爭 |
영어음역 | Uibyeong Hangjaeng |
영어의미역 | The Righteous Army Resistan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임진왜란 당시 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의병들의 항쟁.
[개설]
임진왜란은 일본이 오랜 기간 전국 시대를 통하여 전쟁 경험을 쌓고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당쟁에만 몰두하여 군비가 전무한 상태였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서울까지 오는데 20일이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왜군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변방의 장수와 수령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백성들도 피난하여 마을이 텅텅 비었다. 이때에 민족과 국가를 보전하기 위하여 양반들이 창의(倡義)하였다.
[내용]
김천 지역에서도 기동[구성면 광명리]의 여대로(呂大老)가 가동(家童)과 마을 장정 30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곡간의 곡식을 군량미로 풀자 숫자가 500명으로 불어났다. 이어 김면, 권응성(權應聖) 등과 지례전투에서 공을 세워 초유사 김성일의 천거로 지례 현감이 되었으며 인근 4읍 5군의 의병장이 되어 김천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여대로와 사돈 간이었던 조마면 장암리의 권응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권응기에게 “충효는 일체라. 너는 가문을 보존하고 나는 나라의 부름에 응하리라.”하고 가동 30여 명과 재산을 내어 창의하였다. 그리고 여대로와 고령에서 창의한 김면 의병 총대장 등과 함께 지례전투, 석현전투 등 김천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대항면 공자동의 정유한(鄭維翰)은 군수 이우빈의 격문을 보고 봉계로 숨어들어 장정 150명을 모아 흑운산[봉계 서쪽 산]에 진을 쳤다. 9월 초 진주의 김시민이 거느린 2000명의 관군이 개령에 주둔하고 있던 적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공자동의 적을 칠 때 김산군과 합세하여 입석 판교까지 유인하는데 성공하여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다. 고령에서 창의한 김면은 의병 총대장으로서 김천 지역의 왜군을 몰아내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 황간에서 창의한 박이룡은 하로[양천동]에서 500명의 군진을 설치하여 활약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 김천 지역의 경우 경상북도 지방을 장악한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개령현에 주둔하면서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상도 일원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견고한 이중 목책을 구축하고 개령의 백성 700~800명을 목책 내에 가두고 온갖 사역에 다 동원하였다. 이에 여대로·권응성·정유한 등이 김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인근의 김면·박이룡·김시민 등과 의병 연합군을 형성하여 왜적의 전라도 진출을 막고 김천 지역에서 이들을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