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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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應聖 |
영어음역 | Great Monk Byeogam |
이칭/별칭 | 희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손경희 |
몰년 | 15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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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 1593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숙(熙叔).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만호 권흠이다. 동생으로 권응기가 있다.
[활동 사항]
권응성(權應聖)[?~1592]은 지금의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우가 극진하고 지용이 출중하였다. 도량이 넓고 장부의 기상이 있어 독서하되 손오병서를 읽을 때는 “장부로 태어나 나라가 위태할 때 백성을 편안하게 못한다면 죽어도 이름 없는 귀신이 되리라”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권응기에게 “충효는 일체라. 너는 가문을 보존하고, 나는 나라의 부름에 응하리라.” 하고 가동(家僮) 30여 명과 재산을 내어 창의(倡義)하였다.
권응성은 의병장으로서 소모관 여대로(呂大老)와 의병장 김면과 합심하여 같은 해 8월 지례의 왜적을 화공(火攻)으로 퇴치하고, 초유사 김성일이 독전을 하는 가운데 권응성과 여대로는 늘 선봉에 서서 싸웠다. 그해 11월 석현[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적이 대거 밀려오는데도 아군은 중과부적에다 군장비도 없어 석전(石戰)으로 진을 사수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권응성은 분연히 일어나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라면서 세 차례나 적진으로 뛰어들어 몸이 한 군데도 성한 곳 없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천시의 향토 의병사에서는 권응성이 첫 순국자로 기록된다. 1593년(선조 26) 조정에서 첨정(僉正)을 증직하였고, 『충절록(忠節錄)』에 기록되었다. 여대로는 그의 묘갈명에 “의리에 살아 충절을 이루었으며, 떳떳한 이름을 만대에 밝혔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