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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839
한자 白時珩
영어음역 Baek Sihyeong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664년연표보기
몰년 1708년연표보기
추모 1776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대신동
묘소|단소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은기리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수원(水原)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수원(水原). 승선 백귀선의 9세손이다. 첫째 아들 백봉주(白鳳周)[1698~?]와 둘째 아들 백봉양(白鳳陽)[1700~1758], 손자인 백봉양의 아들 백상정(白尙淨)[1748~1817] 네 명이 3대에 걸쳐 효(孝)를 행하였다.

[활동 사항]

백시형(白時珩)[1664~1708]은 지금의 김천시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김산군의 군무를 맡아 보던 관아에서 호장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청렴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였는데도 예의범절이 어른에 못지않았다. 홀아버지를 모시는 데 정성껏 하여 향리들이 모두 효자라고 불렀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별다른 음식을 얻게 되면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또한 그 음식을 작은아버지를 드렸으며, 작은아버지를 부모님 섬기듯이 하였다. 그리고 평생에 좋은 옷을 한 벌도 입지 않았으며 몸가짐도 단정하였다.

백시형의 효행은 자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아들 백봉주는 40년간 통영군리로 역임하면서 직무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행실도 숙연하였으며 한 잔의 술이나 한 그릇의 죽이라도 형제간에 나눌 만큼 우애가 뛰어났다. 무신란[이인좌의 난] 당시 김진옥과 공을 세워 나이 40세에 양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차남 백봉양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효자였다. 백봉양은 9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 채소만 먹고 견뎌 몸이 극도로 허약해졌다. 어머니가 “몸을 소중히 하는 것도 효도”라면서 고기를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권하였지만, “아버지가 평생 고기를 드시지 못하였는데 어찌 먹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 입에 대지 않았다. 또한 어머니가 병에 걸려 앓다가 돌아가시자 3년간 상복을 한 번도 벗지 않았다. 성장해서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성묘하기를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백시형의 손자인 백상정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효성을 본받아 효를 행하였다. 백상정은 겨우 이를 갈 나이 때부터 효성스러웠다. 그 무렵 어머니가 알지 못할 괴질에 걸려 병석에 누웠는데 어른들과 같이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몇 번을 기절하였고, 60세가 되어 더욱 어머니 생각이 나자 어려서 입지 못하였던 상복을 입고 삼년을 지냈다. 일찍이 풍뢰당 정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천지인의 삼극도(三極圖)를 그려 천리를 이해하고, 선유의 정론으로서 『삼극간요(三極簡要)』를 찬집하여 스스로 실천하였다. 이에 정목이 그의 정미한 소견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손자인 백상정의 묘소와 함께 김천시 어모면 은기리 은석마을 정각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76년(영조 52)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통정대부의 품계가 증여되었고, 동지의금부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었다. 사림에서 효행을 여러 차례에 걸쳐 천거하여 도내 효행록에 사적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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