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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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음역 | Uibyeong |
영어의미역 | Righteous Army |
이칭/별칭 | 민병(民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순철 |
[정의]
1895년에서 1909년 사이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섰던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
[개설]
청일전쟁 이후 중앙 정국의 동요 속에 국가 전체가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유생들이 중심이 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민중 봉기는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호남 지역의 거유(巨儒)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등이 태인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도 1906년 무렵이다.
[의병 활동]
1895년경부터 활동을 개시한 전라도 지역의 의병들은 군청 등을 습격하여 세금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하고 노획한 무기로 전열을 가다듬어 기세를 올렸다. 전라도 의병들의 기세가 높아지자 일제는 경찰을 동원하여 제압에 나섰으나, 전라도 의병들은 순창 등지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순창군수 이건용을 설득하여 의병 활동에 가담하게 하였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군 수비대는 초긴장하여 전주의 진위병으로 의병 부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백성들도 기우는 국운에 비분하며 관군을 적대시하고 의병을 적극 지원하는 등 구국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1907년 1월부터 8월까지 전라북도 내의 의병 교전 횟수는 월 평균 19회였으며, 기록상으로 보면 1908년 9월부터 1909년 8월까지 월 평균 25회로, 총 300회 이상의 교전 기록을 남겼다. 특히 이 중에는 거물급 의병장인 기삼연 부대가 고창군 고수면의 문수사에서 일본군과 대접전을 벌였고, 이어 고창성을 습격하여 일본 경찰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한 것은 당시 포사대장으로 있던 고수면 은사리 출신 의병장 박경래[박도경]의 주도면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성내에 있는 동지들과 사전 내통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박경래는 1907년 11월 1일 고창읍에 80여 명의 의병을 위장 투입하여 일본인 2명을 살해하고, 1908년 2월 19일에는 악랄한 한국인 세리(稅吏)를 참수하여 일제의 앞잡이들에게 경고하였다.
1907년 11월 9일, 당시 법성포 주재소의 순사부장은 “약 4백 명의 폭도가 무장읍을 습격한다.”는 통문을 군아에 보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 해 10월 31일 오후 5시 의병 부대가 무장읍에 입성하자 순사와 보조원이 사복을 입고 법성포 주재소로 도망하여, 보조원의 기총 1정과 엽총 2정, 그 외 검 6자루, 탄환 30발, 제복 등을 빼앗겼으며, 의병들이 군아의 수서기와 소재지에 사는 친일 자산가 김승지를 납치하였으나 일본 경찰은 방어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고창 지역 의병의 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호남 지방의 의병들은 다른 지방 의병들처럼 기동성을 가진 소규모의 게릴라식 전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부대의 정규전을 시도했으며, 향리의 방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지방까지 진격하여 방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의병장]
당시 고창 지역 출신 의병장으로 전라도 각지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박도경(朴道京)·서종채(徐鍾採)·이철형(李哲衡)·유장렬(柳漳烈)·정시해(鄭時海)·고석진(高石鎭)·김공삼(金公三)·정대홍 등이 있었으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은 김영백·전해산·김용구·한태남·이창수·김홍조·김천홍·최경현(崔敬賢)·김세박 등이다. 고창 지역에서의 대·소규모의 접전 기록과 의병 명단은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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