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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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可觀 |
영어음역 | Yun Gagw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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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
성별 | 남 |
몰년 | 1387년 |
본관 | 해평 |
대표관직 | 판밀직사사 |
[정의]
고려 후기 구미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지문하성사 윤지표(尹之彪), 아버지는 대호군 윤보(尹寶)이다.
[활동사항]
윤가관은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가까이서 보필했는데 1373년(공민왕 22) 공민왕이 한안(韓安)·홍륜(洪倫) 등으로 하여금 모든 비빈들을 욕보이게 하면서 익비(益妃)를 범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의 미움을 받아 서인으로 폐하여졌으나 곧 풀려나 우왕 때 판밀직사사에 올랐다.
1383년(우왕 9) 경상도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다가 안동, 예안 등지에서 패하고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 12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합포(合浦, 현 경상남도 마산)에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함양에서 진주목사 박자안(朴子安)과 함께 왜구와 싸워 크게 이겼다. 당시 왜구가 축산도(丑山島)를 거점으로 자주 침략하므로 배와 병사를 두어 방비하도록 하여 이후 왜구의 침략이 잠시 중단되었으며, 버려진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둔전을 개척하여 군량을 넉넉히 하였다. 윤가관은 공민왕대 가장 활을 잘 쏘는 인물로 평가되었으며 무략(武略)이 있었다. 또 성품이 청렴하여 염리(廉吏)의 표본이 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왜구를 막은 일과 관련된 윤가관의 행적이 『기년편고(紀年便攷)』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가관은 해평 사람으로 윤석의 증손이며 도첨의 윤보의 아들이다. 본래 왜적은 추산도를 통해 침입했는데 윤가관은 합포에 부임하여 배와 병사를 둘 것을 건의하였다. 그 후 왜구의 침략이 잠시 중단되었다. 성품이 청렴하여 노는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버려진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둔전을 개척하여 군량을 공급하고 해어진 말 안장과 말 재갈을 삼줄로 깁게 하였다. 벼슬은 판밀직사도원수에 이르렀다. 우왕 정묘년에 죽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삼봉집(三峰集)』 제2권 「윤밀직가관만사(挽尹密直可觀輓詞)」에서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추모하였다. “방년에 대궐을 숙직할 적에/ 백일이 단심을 비추었다오./ 고부에선 추기를 긴밀히 했고/ 남주에선 은혜와 사랑 깊었답니다./ 태산이 무너져라 우러를 곳 어디더냐/ 하늘 이치 멀고멀어 알기 어렵네./ 옥수가 묻히는 걸 차마 보겠나/ 괴로운 눈물은 옷깃을 적시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