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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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順孫 |
영어음역 | Jang Sunson |
이칭/별칭 | 사호(士浩),자활(子活),오재(悟齋),송암(松庵),문숙(文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조선 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사호(士浩)·자활(子活), 호는 오재(悟齋)·송암(松庵). 장순효(張純孝)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장경원(張敬源), 아버지는 군수 장중지(張重智), 어머니는 고승안(高承顔)의 딸이다.
[활동사항]
장순손은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정언, 회령판관을 역임하고, 1496년(연산군 2) 홍문관에 들어가 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99년에는 의정부사인으로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내외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504년 홍문관부제학 재직 시 과거 연산군의 사냥에 대해 간언한 것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경상도관찰사에 보임되었다. 1509년(중종 4)에는 저화(楮貨)의 재사용을 주장하였으며, 1515년에는 변방 방비책과 군량 확보책을 건의하였다. 1516년부터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계속 사직을 요청하였다.
1518년(중종 13)에는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현량과(賢良科) 실시에 반대하였다가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일파로 몰려 파면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자 다시 복직되었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33년 영의정에 올랐다. 실록의 졸기(卒記)의 평가에 의하면, 장순손은 탐심이 많으며 김안로에게 아부하였던 인물로 되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