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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오산기」[허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05
한자 遊金烏山記-許薰-
영어의미역 Travel Writing of Geumo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영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행문
작가 허훈(許薰, 1836~1907)
창작연도/발표연도 1867년(고종 4)연표보기

[정의]

1867년(고종 4) 경상북도 구미 지역 출신의 허훈금오산 일대를 유람한 후 쓴 기행문.

[개설]

허훈(許薰, 1836~1907)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 지역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방산(舫山)이며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맏형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의 공포를 계기로 항일 운동에 나섰다.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금오산기」(허훈)는 허훈이 1867년 6월 지천정사를 완공하고 중양절(重陽節)을 맞아 정사 주위의 금오산 일대를 유람하며 인근 지역의 선현들을 추모하고, 지천정사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을 칭송하여 쓴 기행문이다.

[내용]

봉명산(鳳鳴山,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 위치) 북쪽에 자리한 지천정사는 앞으로 금오산을 마주하고 남쪽으로는 여러 골짜기들을 내려 보고 있다. 석축과 오래된 성가퀴(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장(女墻))는 구름 속에 숨어 있고 큰 소나무는 벽에 푸릇하게 우뚝 솟아나 우러러 볼 수는 있어도 누를 수는 없었다. 그 중간에는 맑은 시내가 휘감아 흐르며 지천정사 앞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갔다.

1867년 지천정사가 완공되던 무렵, 맑고 상쾌하며 구름이나 바람 한 점 없는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흥겨운 나머지 관동(冠童) 몇 명을 데리고 금오산 유람에 나섰다. 금오산의 골짜기는 그윽하고 아름다웠고 나는 듯한 폭포와 맑은 연못이 있었다. 우러러보니 산길이 험준하고 구불구불하여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정오가 못 되어 남문(南門)의 옛터를 따라 들어가자 포루(鋪樓)가 그 위에 있었는데 이미 무너진 지가 백여 년이 되어 보였다. 조금 걸어가자 십여 채의 인가가 연못가의 고목 사이로 비쳐 보였다.

진남사(鎭南寺, 금오산 정상 부근에 있던 절)에 올라서 예전에 독서하던 때를 회상해 보니 지금의 나의 학문은 진전이 없고 명성 또한 이루어지지 못하여 아쉬움과 탄식을 금하지 못하였다. 진남사의 뒷길을 돌아 나가자 오십여 장의 높다란 바위 두 개가 서 있는데, 너비는 길이의 배가 되어 보였고 바위 사이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으며, 그곳을 지나자 약사암(藥師菴)이 있었다.

암자의 노승과 암자 근방의 수려한 경관을 이야기하고, 동북쪽의 청량봉(淸凉峯)을 바라보며 동방의 대현(大賢)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덕을 그리워하고, 남쪽으로는 무흘계곡(武屹溪谷)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단엄한 기상을 추억하였다. 동쪽으로는 낙동강 가의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비석을 바라보며 충절을 되새겼고, 강 건너 숲 깊숙하게 자리한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사당을 바라보며 덕행을 사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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