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A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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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호 |
해평이라는 지명은 신라후기부터 사용되었는데, 그 전에는 파징(波澄)이라고 하였다. 큰물이 났을 때 주산인 갈마산에 올라 보면 사방이 물로 가득하여 마을 전체가 마치 바다를 이룬 것 같았다고 한다. 다시 물이 빠졌을 때는 들판 역시 바다 크기만 하였을 것인데, 그런 맥락에서 마을 이름도 예로부터 해평(海平)이라고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다른 어떤 곳보다 바다와의 직선거리가 가장 먼 곳이라고 간주하면서도 낙동강에 인접해 있어 바다와 같은 물을 늘 접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덧붙여 해평이라는 명칭이 면을 가리키는 정식 행정명칭으로 정해진 것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라고 한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초대면장을 역임한 우용택 씨와 관련한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 전승되고 있다.
우용택 씨는 의성 출신으로 구한말 매관매직이 성행한 사회상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사람됨이 바르고 배짱 또한 매우 두둑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에 거주하는 손자들은 오늘날 독립유공자 가족의 대우를 받고 있으며, 마을에는 그에 대한 일화들이 오늘날까지 많이 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해평리의 이름이 해평으로 된 사연이라고 하겠다. 당시 면의 이름을 어떻게 정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논의들이 있을 때 바로 우용택 씨가 나서서 면장인 자신이 사는 곳을 면의 이름으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만 하더라도 해평의 실질적인 중심은 아골(衙골, 官衙골)이었으며, 아골 아래에는 관창(官倉)이 있던 창말, 그리고 그 밑에 토성인 산성마가 있었다. 그곳은 오늘날 낙성1리에 해당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면의 행정구역 명칭은 대개 면 지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의 이름을 따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관아가 있는 곳이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해평면이 대표성을 띠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면장인 우용택 씨가 해평에 거주함으로써 결국 해평이라는 이름은 면 공식명칭이 된 것이다.
반면에 관아가 있던 곳의 아골, 창말, 산성마 등은 낙성리라는 공식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낙성리라고 한 이유는 바로 면 공식명칭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관아가 있던 곳의 이름을 원래의 의미대로 한다면 낙성(落成)인데, 차마 지명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중국 낙양의 이름을 따서 낙성(洛成)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낙성리 주민들은 서로 다르게 인식할 수 있으나, 오늘날 해평 주민들은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그렇게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