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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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炳漢 |
이칭/별칭 | 중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제우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윤병한(尹炳漢)은 본관은 칠원(漆原), 호는 중암(重岩)이며, 1873년(고종 10) 3월 20일 충청남도 당진군 순석면 갈산리에서 출생하여 1932년 10월 4일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대한제국 육군 참위인 윤병한은 일제가 강제로 군대를 해산하자 의병 항일전에 참여하다가, 한일병합 후 고향인 진천으로 돌아와 농민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조림사업을 위하여 면유림을 대여받고 서산계(西山契)를 조직하여 계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천 읍내 이상직(李相稷) 등과 연락하여 4월 2일을 기해서 온 군민이 일제히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윤병한은 광혜원의 동지 정관옥(鄭寬玉)·오은영(吳殷泳) 등과 거사 계획을 의논하여 자신이 경영해오던 회죽리 일대의 면유림에 식목하는 4월 2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4월 2일 윤병한의 지휘로 식수 작업 중인 회죽리 현장 산골에서 정운화(鄭雲和)·남계홍(南啓弘)·백선옥(白先玉)·이영호(李榮鎬)·유치선(柳致先) 등 200여 명이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광혜원 장터로 시위 행진을 결행하였다.
시위 군중의 행렬이 만승면사무소에 이르러서는 면서기에게 “너희들은 한국 사람이니 같이 시위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라!” 하고 면사무소에 투석하고 곡괭이 등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동시에, 인근에 새로 건설 중이던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공사 현장의 건축자재들을 폐기시키고 벽을 곡괭이로 헐어버리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저녁에 면사무소를 찾아가 광신사에서 기안해 놓은 대한제국 독립을 구가하여 만세를 외치라는 경고문을 김동화(金東華)를 시켜 백지에 쓰게 한 후 직원 박수문(朴壽文)으로 하여금 20여 매를 인쇄시켜 이 날 밤 장터 곳곳에 붙여놓게 하였다.
이튿날인 4월 3일 광혜원 장날 모여든 장꾼들을 계몽하여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만세 시위를 벌여 군중이 2,000명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광혜원 헌병분견소장 니오유에[入江]의 원군 요청으로 달려온 진천 헌병대원 10여 명이 시위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 시위대는 1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를 낸 채 해산되었다. 4월 4일 진천으로부터 일본 헌병 20여 명이 증파되어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윤병한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그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소요 및 출판법 위반 협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윤병한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