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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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突馬面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집필자 | 김성환 |
성격 | 고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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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문헌 | 『여지도서』|『호구총수』|『남한지』 |
[정의]
본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에 속했던 행정지명.
[개설]
돌마면은 현재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지역에 편입된 성남시의 옛 행정구역이다.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던 지방행정 구역으로 『여지도서』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는 2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1907년에 세촌면, 낙생면과 함께 근대적 행정 단위로 설치되었다.
[명칭유래]
‘돌마’라는 명칭은 ‘말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매지봉의 남쪽 산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이 말들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군대가 낙생면의 험천[현재의 분당구 구미동 탄천의 지류인 동막천]에서 청나라 군사에게 패하자 그때 주인을 잃은 병마들이 산속에 있다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개 물이 돌아 흐르는 곳이나 마을이 산과 강으로부터 돌아 앉아 있는 경우 석(石), 돌(突), 주(周), 도(島), 회(回), 곡(曲) 등의 이름이 붙으므로 ‘탄천으로부터 돌아앉은 마을’이라는 뜻에서도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구(安玖)의 묘에 ‘영장산 돌마방(突馬坊) 율리 구봉하(龜峰下)’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돌마라는 지명의 사용은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돌마면에는 상동리와 하동리의 2개 마을만이 있었으며, 돌마면에 속한 편호(編戶)는 495호, 인구는 2,505명[남자 1,097명, 여자 1,408명]이었다. 이후 조선 정조 13년(1789)에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편호 515호, 인구는 2,773명[남자 1,383명, 여자 1,39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헌종 2년(1836)에 작성된 『남한지』에는 편호 460호, 인구는 2,364명[남자 1,140명, 여자 1,22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돌마면이 조선시대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근대적인 행정 단위로서의 돌마면이 설치된 것은 1907년이다. 조선시대에는 상동리(上洞里), 하동리(下洞里) 2개 마을로 기록된 것과는 달리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06)에는 갈현리, 옹점리, 여수동, 오야소동, 하탑동, 상탑동, 이매동, 통로동, 양현리, 둔서촌, 율리, 분점리, 당우리, 수내촌, 정자동을 관할 구역으로 기록하였으며,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4)에는 갈현리, 도촌리, 여수리, 야탑리, 율리, 이매리, 서현리, 분당리, 수내리, 정자리, 하대원리 등이 기록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들어 마을의 세분 및 행정구역 폐합이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59년 12월 30일 이매리로 면사무소를 이전하여 면적 39.60㎢에 11개 동리 인구 6,763명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가 설치되어 기존의 중부면 성남출장소 관내 6개리와 대왕면, 낙생면과 함께 성남출장소에 편제되었다.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되고, 1975년 3월 17일에는 돌마출장소가 신설되면서 분당동, 수내동, 정자동, 율동, 이매동, 야탑동, 서현동, 여수동, 갈현동, 도촌동, 하대원동을 관할하게 되었고, 이후 1991년 분당구가 신설되면서 분당구에 속하게 되었다.
[현황]
현재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관할의 여수동, 갈현동, 도촌동, 하대원동과 분당구가 신설되면서 편입된 분당동, 수내동, 서현동, 정자동, 이매동, 야탑동, 율동 등의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