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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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涵-墓出土衣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의복/의복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희태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68년 - 김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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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98년 - 김함 사망 |
제작 시기/일시 | 1598년경 - 김함의 묘 출토의복 제작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5년 4월 - 김함의 묘 출토의복 석주선 기념 박물관 기탁 관리 |
출토|발견 시기/일시 | 1985년 4월 15일 - 김함의 묘 출토의복 김해 김씨 선산 묘역 이장 때 출토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7년 2월 16일 - 김함의 묘 출토의복 국가민속문화재 제209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함의 묘 출토의복 국가민속문화재 재지정 |
소장처 | 단국 대학교 죽전 캠퍼스 석주선 기념 박물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로 152 |
출토지 | 김해 김씨 선산 묘역 김함 무덤 -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 |
성격 | 장례 복식 |
재질 | 명주|무명 |
관련 의례 | 초혼장 |
입는 시기 | 장례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가민속문화재 |
[정의]
조선 시대 무관 김함의 묘에서 출토된 장례 복식류 17건.
[개설]
김함의 묘 출토의복 은 1985년 4월 15일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 김해 김씨 문중 선산 묘역을 재정리·확장하기 위하여 이장하던 중 무관 김함(金涵)[1568~1598]의 묘에서 출토된 장례 복식류 일괄 유물 17건을 일컫는다.
출토 당시 김함의 시신 대신 나무로 시신 형상을 만들어 염습(殮襲)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와 함께 장의(長衣) 형태의 직령(直領) 3점, 저고리 2점, 속바지 2점, 이불 1점, 모자 1점, 버선 1족, 신 1쌍 등 총 11점의 복식이 출토되었다. 또한 30과(顆)로 꿰어진 목걸이와 삼 껍질로 만든 제웅[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물건] 5점이 출토되어 모두 17점이다.
의복류는 보공품(補空品)으로 사용된 것으로 수량이 적고 빈약한데, 아마 임진왜란 중이었기 때문에 약식 장례로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7년 2월 16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2013년 현재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단국 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서 기탁·관리하고 있다.
[연원]
김함은 김해 김씨로 자는 여숙(汝淑)이며, 김극희(金克禧)[1532~1592]의 아들로 전라남도 영암에서 출생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무과에 별시 병과 127위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며, 1598년(선조 31년) 정유재란 때 한산도 해전에서 부친 김극희와 함께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이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묘주(墓主)가 한산도 해전에서 순절하여 시신을 찾지 못하자 나무로 시신의 형상을 만들어 염습하여 장례를 치룬 특수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또한 30과로 꿰어진 목걸이가 있었고 삼 껍질로 만든 제웅 5점은 군졸(軍卒)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형태]
출토 복식으로는 장의(長衣) 형태의 직령(直領) 3점, 저고리 2점, 속바지 2점, 이불 1점, 모자 1점, 버선 1족, 신 1쌍 등으로 총 11점이다. 목에는 30과로 꿰어진 목걸이가 있었으며 팔 아래로 삼 껍질로 만든 제웅이 5점 출토되어 모두 17점이다.
1. 누비 직령포(直領袍) [국가민속문화재 제209호-1]
‘누비 직령포’는 두루마기형 포류로 작은 꽃[細花]과 보문(寶紋)이 시문된 화문단을 누벼서 만들었는데 출토 당시 아청색(鴉靑色)이 많이 남아 있었다. 깃과 소형 사각무는 소색의 운문단(雲紋緞)이며, 거들치[苔袖]는 백색 주(紬)로 되어 있다. 뒤 길이는 122㎝, 화장은 83㎝, 품은 75㎝이다.
원래 장옷은 같은 크기의 목판깃과 이중 섶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인데, 이 옷의 안섶은 이중 섶이지만 겉섶과 달리 약간 작게 만들어져 있다.
2. 직령포(直領袍)[국가민속문화재 제209호-2]
‘직령포’는 솜 장옷으로 겉감은 아청색 무명을, 안감은 청색 무명을 사용하고 사이에 솜을 넣어 만들었다. 누비 직령포[아청색 화문단 솜 누비 장옷]와 달리 안섶이 하나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양과 크기에 있어서 겉섶과 더욱 비대칭을 이룬다. 길이 116㎝, 화장 85㎝, 품 82㎝로 누비 장옷보다 길이는 짧으나 품은 더 넓다.
3. 저고리[국가민속문화재 제209-3호]
2점의 저고리가 출토되었는데, 1점은 명주이고 1점은 무명이다. 아청색 무명 저고리는 뒷길이 59㎝, 화장 83㎝, 뒤품 83㎝이다. 11㎝ 너비의 목판깃이 섶에서 반쯤 들여서 달려 있으며, 소색 세주로 만든 동정이 달려 있다.
화장에 비해 품이 상당히 넉넉하며 옆트임이 없고, 소형의 사각무가 겨드랑이에 달려 있지 않은 한쪽 무로 구성되었다. 겉길 쪽에 달린 겉고름은 자색인 반면에 안길 쪽에 달린 겉고름은 아청색인데 물든 것으로 보인다. 안고름은 없다.
4. 모자[국가민속문화재 제209-4호]
모자는 겉감이 아청색 무문단(無紋段)이며 안감은 소색 명주로 만들었다. 겉감의 무문단은 ‘5매수자직’으로 제직되었는데, 문헌에 나타나는 모단(帽段)으로 생각된다. 상단은 여섯 개의 삼각형 천을 이어서 만들었고, 하단에는 일자로 대륜을 둘렀으며 높이 19㎝, 지름 33㎝이다. 겉감과 안감 사이에는 소털이 2㎝ 정도의 두께로 들어 있고, 모자의 정수리에는 매듭단추가 달려 있다.
이러한 모자는 변수[1447~1524], 김흠조[1461~1528], 이석명[1513~1583], 이응태[?~1586], 심수륜[1534~1589]의 묘에서도 출토되어 조선 시대 전기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썼던 모자의 종류로 추측된다. 감투 혹은 소모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5. 속곳[국가민속문화재 제209-5호]
바지 2점이 출토되었는데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각각 속곳과 내친고(內襯袴)로 등재되었다.
속곳은 삼베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73㎝로 짧은 편이고, 부리가 68㎝로 넓다. 정삼각형의 밑바대가 허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양쪽 가랑이와 연결되어 있다. 맞주름을 잡아 허리를 달았는데, 주름 너비는 일정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바느질이 거칠다. 같이 출토된 장옷이나 저고리가 여자의 것인 점에 비추어 이 삼베 바지도 여자의 속곳류로 추정된다.
6. 내친고[국가민속문화재 제209-6호]
바지 2점이 출토되었는데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각각 속곳과 내친고로 등재되었다.
발굴될 당시만 해도 이처럼 통이 넓은 바지는 모두 여성의 속곳 종류로 단정하였지만, 현재는 사폭 바지가 생기기 이전의 남자 바지 형태도 여성과 동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7. 누비버선[국가민속문화재 제209-7호]
무명으로 만든 누비버선 1켤레이다.
8. 부들신[국가민속문화재 제209-8호]
명주실이나 무명실을 꼬아서 매듭지은 실로 엮은 신발 1켤레이다
9. 이불[국가민속문화재 제209-9호]
묘에서 출토된 이불 1점이다.
10. 주(珠)[국가민속문화재 제209-10호]
대나무로 만든 시신 형상의 목에서 나온 30과로 꿰어진 목걸이다.
11. 제웅[국가민속문화재 제209-11호]
대나무로 만든 시신 형상의 팔 아래에서 나온 삼 껍질로 만든 제웅 5점으로, 이는 군졸(軍卒)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용도]
장례 복식으로 출토 유물은 장옷 3점, 저고리 2점, 바지 2점, 모자 1점, 누비무명버선 1쌍, 부들신 1쌍, 이불 1점, 주(목걸이) 1점, 제웅 5점 등 17건이 수습되었다. 전란 중에 김함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대신 대나무로 시신 형상을 만들어 염습을 한 상태로 출토되어 일종의 초혼장 장례 복식으로 볼 수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김함의 묘 출토의복 은 조선 시대 중기 장례 문화사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전란 중에 순절한 주인공의 시신 대신 대나무로 시신 형상을 만들고 염습을 한 형태로 출토되어 당시 장례 풍습과 복식 문화사를 알 수 있다. 솜옷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보공품으로 솜옷이 관의 내부를 채워 관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