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53 |
---|---|
한자 | 榮州面萬歲示威運動 |
영어공식명칭 | Independence Movement in Yeongju-myeon |
이칭/별칭 | 영주동 만세시위운동,영주면 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시작 |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전개 |
종결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영주장터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
종결 장소 | 영주장터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
성격 | 독립운동 |
관련 인물/단체 | 박인서|오하근|권태중 |
[정의]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영주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개설]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장터에서 일어났다.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박인서(朴仁緖)·오하근(吳夏根)·권태중(權泰中)이 주도했다.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준비해 간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게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군중은 해산당하면서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영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지만, 그 배경으로는 민족자결주의 사조나 도쿄 2.8독립선언과 같은 외인과 거의 관계없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과 영주 지역 주민들이 당면한 식민통치라는 현실 문제가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경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사람은 박인서·오하근·권태중 3인이다. 봉화군 상운면 출신 박인서는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인근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영주군 이산면의 오하근과 협의하여 3월 21일[음력 2월 20일] 영주면 장날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하근은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의 권태중에게도 연락하여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박인서가 오하근에게 부탁해 권태중에게 1919년 3월 21일까지 태극기를 15매를 준비하도록 했다. 1919년 3월 21일 박인서와 오하근은 태극기를 숨겨 영주장터로 갔다. 박인서는 쌀시장을 중심으로, 오하근은 어물시장을 중심으로 장에 모이는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오후 5시 무렵 이들은 쌀시장과 어물시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영주장터에 모인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렬을 이루고 행진을 하려고 할 때, 순찰 중이던 헌병들이 달려왔다. 박인서와 오하근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시위 행렬도 흩어지면서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종결되었다.
[결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주도자 중 권태중은 태 90도, 오하근은 징역 1년 6월, 박인서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하나는 1919년 3월 21일 영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남으로써 주변 지역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의 주도자인 박인서와 오하근은 한학을 함께 공부한 지식층 인사로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과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고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