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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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夏根 |
영어공식명칭 | O Ha-geun |
이칭/별칭 | 농고(聾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 오하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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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오하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오하근 징역 1년 6월형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오하근 공소 기각 및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71년 - 오하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9년 - 오하근 항일투사농고오하근공기념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오하근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오하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오하근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
거주|이주지 | 오하근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
활동지 | 오하근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오하근(吳夏根)[1897~1963]은 1919년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가계]
오하근의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농고(聾故)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오응철(吳應澈)이며, 1897년 10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사일마을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오하근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익혔다. 23세가 되던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것과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던 중 평소 친분이 두터운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에 사는 박인서(朴仁緖)와 박인서의 친구 권태중(權泰中)을 만나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하근은 박인서·권태중과 함께 사전 준비를 하면서 자신은 영주군, 박인서는 봉화군 일대에서 군중을 규합하기로 했으며, 한편으로는 권태중에게 태극기 15매를 제작하게 하였다. 3월 21일 오하근은 박인서와 같이 태극기를 숨기고 시장으로 나갔다. 오하근은 어물시장, 박인서는 약간 떨어진 쌀시장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펼칠 준비를 하였다. 오하근은 박인서와 함께 오후 5시 무렵 어물시장과 쌀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하근은 군중들이 모여들자 이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순찰 중이던 일본군 헌병들이 달려와 오하근은 박인서와 함께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오하근은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형 확정으로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묘소]
오하근의 처음 묘소는 영주시 조암동 사일마을에 조성되었으나, 2007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오하근은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979년 항일투사농고오하근공기념비가 영주시 조암동 사일마을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