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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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淡 |
영어공식명칭 | Kim Dam |
이칭/별칭 | 거원(巨源),무송헌(撫松軒),문절공(文節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416년 - 김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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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35년 - 김담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37년 - 김담 집현전저작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41년 - 김담 서장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47년 - 김담 중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48년 - 김담 전라도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51년 - 김담 사헌부장령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52년 - 김담 충주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55년 - 김담 좌익원종공신 1등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456년 - 김담 안동대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58년 - 김담 경주부윤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63년 - 김담 이조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4년 - 김담 중추원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464년 - 김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64년 - 김담 추시 |
추모 시기/일시 | 1712년 - 김담 단계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767년 - 김담 구강서원 제향 |
출생지 | 김담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
부임|활동지 | 김담 부임지 - 충청북도 충주시 |
부임|활동지 | 김담 부임지 - 경상북도 경주시 |
묘소|단소 | 김담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
사당|배향지 | 구강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
사당|배향지 | 단계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선성(宣城) |
대표 관직 | 이조판서|중추원사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담(金淡)[1416~1464]은 세종 연간 문과 급제 후 집현전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왕명을 받아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등을 편찬하였다.
[가계]
김담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아버지는 영유현령을 지낸 김소량(金小良)[1384~1449], 어머니는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1343~?]의 딸 정부인 평해황씨(平海黃氏), 할아버지는 보승낭장을 지낸 김로(金輅)[1351~?], 증조할아버지는 정용호군을 지낸 김방식(金方軾)이다. 부인은 성균관직강을 지낸 문헌(文獻)의 딸 정부인 감천문씨(甘泉文氏)이다. 김담의 선대는 예안 일대에 세거하다가 아버지 김소량 대에 처음 영주 지역으로 이거하였다.
[활동 사항]
김담은 1416년(태종 16)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성동리(城東里)의 삼판서 고택에서 출생하였다. 1435년(세종 17) 형 김증(金潧)[1413~1456]과 함께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바로 집현전에서 활동하였다. 1436년 간의대에서 천문 관측을 맡고 있던 봉상판사 이순지(李純之)[?~1465]가 모친상을 당해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승정원에 적임자 추천을 지시하였는데, 모두 김담을 천거하였다. 이로부터 이순지와 함께 한양을 기준으로한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하였다.
김담은 1440년에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국어(國語)와 음의(音義)를 보정하였다. 1441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고득종(高得宗)[1388~1452]이 명나라 황제에게 함부로 약재를 받은 일과 여진족 이만주(李滿住)[?~1467]의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여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서장관이었던 김담도 감찰을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하지만 곧 복직하였고 봉상시주부·호조좌랑·훈련원주부·사간원우헌납·이조정랑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김담은 1447년(세종 29) 형 김증과 함께 중시(重試)에 급제하였고, 1448년 전라도로 출사(出使)하였다. 14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그만두려 했지만, 세종이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기복(起服)을 특별히 명하였고, 이에 천문을 관측하게 되었다. 이때 세종은 김담에게 옷 한 습과 미두 열 석을 내려주었다.
김담은 1451년(문종 1) 사헌부장령에 올랐다.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불사를 연 대사헌 안완경(安完慶)[?~1453] 족형에 대한 국문을 청하였으며, 흥천사(興天寺)에서 올리는 보공재(報供齋)의 정지를 청원하기도 했다. 1452년(단종 즉위) 충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경내에 도적이 많았는데, 이를 엄히 다스려 도적 떼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김담은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는 어머니 봉양을 위해 고향에서 가까운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하여서, 1458년에는 경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460년 임기를 채웠으나 세조가 특명을 내려, 경주부윤에 계속 있으면서 어머니를 봉양케 하였다. 1463년(세조 9)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을 이유로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였다. 1464년 중추원사에 임명되었고, 1464년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부음을 듣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담은 집현전 학자 출신으로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연간 왕명을 받아 다수의 저술을 편찬하였다. 김담이 왕명을 받아 여러 학자와 더불어 편찬한 저술로는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태양통궤(太陽通軌)』, 『태음통궤(太陰通軌)』 등의 천문 역서가 있다. 형 김증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문집으로는 6권 3책의 『무송헌집(撫松軒集)』이 전한다.
[묘소]
김담의 묘소는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손골에 있는데, 인근에 묘소 수호 시설인 빈동재사(賓洞齋舍)[국가민속문화재 제292호]가 설립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김담은 1464년(세조 10) ‘문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귀강서원(龜江書院)[영주시 휴천동]과 단계서원(丹溪書院)[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