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03
한자 金瑩
영어공식명칭 Kim Yong
이칭/별칭 의겸(義兼),괴헌(槐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5년연표보기 - 김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04년 - 김영 식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14년 - 김영 예조정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15년 - 김영 병조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16년 - 김영 훈련원판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21년 - 김영 사헌부지평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22년 - 김영 성균관전적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27년 - 김영 자여도찰방 부임
몰년 시기/일시 1840년연표보기 - 김영 사망
거주|이주지 영주 괴헌고택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영봉로 883[두월리 877]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김영 부임지 - 경상남도 창원시
묘소|단소 김영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예조정랑|자여도찰방|사헌부장령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영(金瑩)[1765~1840]은 1804년(순조 4)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자여도찰방·사헌부장령 등을 지냈다.

[가계]

김영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의겸(義兼), 호는 괴헌(槐軒)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경집(金慶集)[1715~1794], 어머니는 금서봉(琴瑞鳳)의 딸 봉화금씨(奉化琴氏)와 김태빈(金兌彬)의 딸 청도김씨(淸道金氏), 할아버지는 김식(金㵓), 증조할아버지는 김광세(金光世)[1700~?]이다. 부인은 금순재(琴舜在)의 딸 봉화금씨이다.

[활동 사항]

김영은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사나운 날씨에도 돌아가신 부모의 성묘를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1804년 식년시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종부시주부·의릉령·예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1815년(순조 15) 병조좌랑에 올랐다. 1815년 5월 한여름 땡볕에 열린 어연(御宴)에 입시하였는데,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지켜 순조로부터 부채를 하사받았다.

1816년 어떤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여 격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병조좌랑이었던 김영은 궁궐 수호에 허술했다는 이유로 보방죄인이 되었지만, 곧 환수되었다. 1816년 훈련원의 주부와 판관에 제수되었으며, 1821년(순조 21) 사헌부지평, 1822년 성균관전적에 차례로 제수되었다.

김영은 1827년에는 자여도찰방으로 부임하였다. 마침 부임지에 흉년이 크게 들어 역(驛)과 인근에 기근이 심하였다. 김영은 녹봉을 털어 이웃 고을에서 곡식 수천 곡(斛)을 바꾸어 온 다음, 달마다 사람 숫자에 맞추어 나누어 주니 고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역적(驛籍)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에 고과에서 최상을 차지하였으며, 기민 구제를 마치고 열린 잔치 자리에서 경상도관찰사는 김영을 상빈례로 대접하였다. 1828년 자여도찰방으로서 향시의 참시관을 맡았는데 공정함이 있었다고 한다. 1829년(순조 29)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부임지를 떠나자, 고을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김영의 선정을 기렸다.

김영은 사헌부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 영천군(榮川郡) 두월리(斗月里)[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로 내려와 소요하였다. 김영이 소요하던 정사의 편액이 ‘월은(月隱)’이었는데, 그 뜰 가운데 회화나무가 있어서 스스로 호를 ‘괴헌’이라고 했다.

[학문과 저술]

김영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괴헌집(槐軒集)』이 전한다.

[묘소]

김영의 묘소는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사그막[사금악(沙金岳)]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영이 살던 집이 영주 괴헌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62호]으로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영주댐 건설로 해체된 상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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