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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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永祜 |
영어공식명칭 | Song Yeong-ho |
이칭/별칭 | 보경(普卿),창주(滄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 송영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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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8년 - 송영호 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24년 - 송영호 북경학원 중등과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송영호 신건동맹단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송영호 군자금 모집 활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6년 - 제2차 유림단의거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송영호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송영호 징역 3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 송영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송영호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송영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송영호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919 |
거주|이주지 | 송영호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919 |
학교|수학지 | 북경학원 - 중국 베이징 |
활동지 | 송영호 활동지 - 중국 베이징|경상북도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민주당 고문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송영호(宋永祜)[1903~1968]는 1925년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김창숙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였다.
[가계]
송영호의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보경(普卿), 호는 창주(滄洲)이다. 1903년 7월 2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에서 아버지 송인상(宋仁相)과 어머니 류하회(柳河回)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우는 송재호(宋在祜)[1906~1974]로 제2차 유림단의거 때 함께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송영호는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다. 12세 때 영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졸업하였다. 1920년 서울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개월 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24년 음력 2월 무렵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동생 송재호와 함께 북경학원 중등과에 입학하여, 1925년 6월에 졸업하였다.
1925년 4월 졸업을 앞둔 송영호는 베이징 서성(西城)에서 김창숙·김화식(金華植)[1902~1950]·이봉로(李鳳魯)[1901~1940]·권상수(權相洙)[1873~1941] 등 영남 출신의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같이하였다. 그리고 김창숙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하였다. 이때 김창숙 등은 군사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20만 원을 영남지방 유림에게 모금 받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에 1925년 6월 말 송영호는 가장 먼저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어 김화식의 국내 잠입과 무기 반입 방법에 대해 연락을 취하였고, 귀국 여비 및 권총 구입 비용 600원을 송금해 주었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김창숙은 서울 관훈동에 마련된 면우집간소(俛宇集刊所)를 중심으로 정수기(鄭守基)[1896~1936]·손후익(孫厚翼)[1888~1953] 등 영남 유림을 만나 본격적인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송영호는 이들의 활동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는데, 즉시 고향 영주로 내려가 자기 소유의 토지 1천 두락을 매각하였다. 그리고 1925년 10월 중순까지 네 차례에 걸쳐 모두 560원을 김창숙에게 송금하였으며, 또 1925년 10월 하순경 400원을 활동 자금으로 송금하였다. 김화식의 활동 경비로도 100원을 지급하는 등 모두 1,700원을 제공해 주었다.
송영호는 1925년 10월 19일 서울 낙원동 134에서 김창숙·곽윤(郭奫)·김황(金榥)[1896~1978]·손후익·하장환(河章煥)[1874~1928]·이기병(李基炳) 등과 함께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신건동맹단은 모험단과 모집단으로 편성되었는데, 송영호는 김화식·정수기와 함께 모험단에 소속되었다. 모험단은 군자금 모집에 불응하는 부호들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방법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송영호는 여러 방면에서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나, 모금액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김창숙과 함께 1925년 12월 말 직접 대구로 내려가 논의할 만한 유림을 대구로 불러들였다. 송영호는 김화식·이영로(李泳魯)[1884~1937]·김창백(金昌百)[1879~1942]·이수기(李壽麒)·홍묵(洪黙)·이동흠(李棟欽)[1881~1967]·이종흠(李棕欽)[1900~1976] 등과 함께 대구 남산동 신형익의 집에서 김창숙을 만나 활동 목표와 지침을 들었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에 불응하는 부호들에게는 무력을 행사하기로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모금 활동에 나서서 대구의 권상경(權相經)[1890~1958]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영주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6년 1월 30일경 군자금 모집을 직접 지휘하던 김창숙이 손후익을 만나기 위해 울산으로 향하던 중, 경상남도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김창숙은 손후익의 집을 비롯하여 울산의 이재락, 동래의 범어사와 금강암 등에서 치료를 받으며 모금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각처와 연락은 끊어지고 모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우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1926년 3월 22일 김창숙은 부산발 베이징행 열차를 타고 3월 23일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상하이로 돌아갔다. 송영호는 1926년 3월 23일 서울에서 김창숙을 만나 김화식과 함께 국내에 남기로 하였다. 상하이로 탈출한 김창숙이 다시 거사를 도모할 경우를 대비해 김화식과 지속해서 조직을 관리하며 국내에서 내응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이 상하이로 탈출한 직후부터 일본 경찰의 본격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이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관련자 600여 명이 체포되어 40~50명이 기소당하였다.
송영호는 1926년 4월 17일 고향인 장수면 호문리 뒷산에서 경상북도경찰부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이에 앞서 체포된 동생 송재호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본가로 돌아와 자결을 기도하였다. 송영호는 김화식·손후익 등 28명과 함께 1926년 12월 2일 예심에 회부되었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첫 공판이 열렸다. 1927년 3월 15일 다시 공판이 재기되어, 3월 17일 징역 5년이 구형되었고, 3월 29일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송영호는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으며, 김창숙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민주당 고문으로 이승만에 대한 반독재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68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송영호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