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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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第二次儒林團義擧 |
영어공식명칭 | The Second Confucianists Affairs |
이칭/별칭 | 제2차 유림단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1925년에서 1926년 사이 영주를 비롯해 경상북도 일대에서 전개된 유림 대표들의 군자금 모집 활동.
[개설]
제2차 유림단의거는 1925년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시작되었다. 송영호(宋永祜)를 비롯해 영주 지역 출신으로는 송재호(宋在祜)·김동진(金東鎭)·김제직(金濟稷)·권상수(權相銖)·박제형(朴濟衡)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6년 관련자들이 체포되면서 제2차 유림단의거는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제1차 유림단의거]이 무산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에서는 독립전쟁 준비 방략을 추진하였다. 이는 장기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사를 양성하고 전쟁비용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1919년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했던 김창숙(金昌淑)은 일본 세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와 몽골 사이 국경지대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것과 이를 위해 자금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고자 함으로써, 제2차 유림단의거가 시작되었다.
[경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은 만주 군벌 펑위샹[馮玉祥]과 의논하여 오르도스[綏遠][지금의 지린성 북부 지역에 있는 도시]와 바오터우[包頭][지금의 내몽골자치구에 있는 도시] 지역의 땅 약 3만 평[99,174㎢]을 받아 이를 독립군 기지로 개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자금 마련은 국내 유림에게 협조를 받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때 김창숙이 계산한 자금은 20만 원 정도였다. 이를 모금하기 위해 김창숙은 베이징에서 유학 중인 영주군 장수면 출신 송영호를 비롯해 경북 봉화 출신 김화식(金華植), 달성[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 이봉로(李鳳魯) 등을 국내에 파견하기로 계획하였다.
1925년 4월부터 7월 사이 김창숙은 김화식, 이봉로 등과 베이징에서 여러 차례 만나 기지 건설 장소와 자금 마련 방법을 구체화했다. 먼저 기지 건설 장소는 베이징 근처 스징산[石景山] 주변의 미간지로 결정하였다. 자금은 영남지방 유림에게 모금하는 형식으로 마련하기로 했는데, 예상 금액은 20만 원 정도이며, 필요하면 무기를 사용한다는 방침까지 확정하였다. 이를 위해 각자 업무도 분담하였다.
1925년 6월 김창숙의 지시로 송영호가 먼저 국내로 잠입하였다. 송영호는 고향 영주로 가서 자금을 마련하고 7월 중 두 차례에 걸쳐 600원을 김화식을 통해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송금하였다. 그 결과 김화식은 김창숙에게 여비 160원을 받아서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입국하였다. 이 무렵 이봉로는 상하이[上海]에서 가져온 권총 2정과 탄환 16발을 나무상자에 숨겨 국내로 반입하였다.
김창숙은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하얼빈을 거쳐 기차로 단둥으로 이동한 뒤 도보로 신의주 철교를 건너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1925년 9월 초 서울 적선동에 회합 장소를 마련하고 이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어서 본격적인 모금 착수에 들어갔다. 송영호는 고향에서 토지를 팔아 1925년 9월에서 10월 사이 5회에 걸쳐 860원을 김창숙에게 보내고, 자신도 400원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김창숙에게 건네주었다.
송영호는 김화식·정수기(鄭守基)와 함께 모험단에 속하여 권총으로 친일 부호 처단과 자금 모집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송영호가 영주로 갈 때 김창숙은 영주군 부석면 상석리[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의 김동진과 영주면 영주리의 정후섭(鄭厚燮)에게 자금 모집원이 되어달라는 서신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동진이 먼저 김창백(金昌百)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자진해서 자기 아들 김제직을 송영호에게 보냈다. 송영호는 김제직에게 영주의 부호들을 물색해 자금을 제공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제직은 부석면의 김규수(金圭秀), 순흥면의 서병희(徐丙禧)·김성림(金聖林), 안정면의 박섭성(朴燮性) 등에 모금을 권유하기로 약속했다. 또 송영호는 영주면 영주리 박제형과 정후섭에게 김창숙의 편지를 전해주려 하였으나 거부당하였고, 박고형(朴高衡)을 통해 면회를 요청했으나, 이마저 거절당했다.
[결과]
유림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금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모험단원의 역할도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다. 더구나 김창숙이 대구에서 울산으로 이동하던 중 언양에서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는 수난을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경찰의 추적도 시작되었다. 우선 확보된 금액이라도 중국으로 옮겨야 했다. 자금을 베이징으로 가져갈 인물로는 마산에서 무역상을 하는 김창숙의 족제 김창탁(金昌鐸)으로 정하고 김창탁에게 부탁하여 그간 모금한 돈 3,350원을 1926년 3월 22일 삼랑진역에서 만나 건네주고, 김창숙은 서울로 갔다가 1926년 3월 26일 열차 편으로 만주 봉천(奉天)[지금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가서 그곳에서 김창탁에게 부탁했던 돈을 되찾았다.
영주에서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서 송영호·송재호 형제와 김동진·김제직 부자, 권상수·박제형 등이 적극적이었다. 송영호는 제2차 유림단의거를 대표하는 인물로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금 1,800여 원을 부담하였고, 동생 송재호도 자진해서 농토를 판 돈 600원을 제공했다. 김동진도 명망 있는 유림으로 아들 김제직을 모금원으로 직접 나서게 했다. 권상수는 김창숙의 처숙부로 베이징에서부터 제2차 유림단의거를 준비하는 데 협력했다. 실제로 김창숙이 모금한 돈 3,300여 원의 대부분은 영주인들이 부담한 돈이었다.
[의의와 평가]
제2차 유림단의거와 관련하여 영주 지역에서도 다수 인물이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송영호·송재호 형제와 김동진·김제직 부자의 활동이 돋보인다. 송영호는 신건동맹단의 모험단원으로 친일 부호 처단과 자금 모금 분위기 조성에 힘쓰는 동시에 영주·봉화·대구 지역 모집단의 책임자였다. 동생 송재호도 모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김동진과 아들 김제직도 모금원으로 나서 활동하였다. 송영호는 김창숙을 도와 제2차 유림단의거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제2차 유림단의거로 모금된 자금은 뒷날 의열단 활동의 밑받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