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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582
한자 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정소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문인이 쓴, 혹은 안산을 배경으로 창작한 문학작품.

[개설]

고전문학은 세분화된 문학 분류보다 시(詩)·서(書)·화(畵) 등을 두루 섭렵했던 학자들의 종합적 예술 활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활동을 했던 학자들로는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과 선조 말에서부터 광해군인조 때까지 살았던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1649년(인조 27)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11세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 1763년(영조 39)에 83세로 세상을 떠난 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인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1713~1791], 『고행록(苦行錄)』을 남긴 진주유씨 제18세손 유명천(柳命天)[1633~1705]의 삼취 정경부인 한산이씨[1659~1727] 등을 들 수 있다.

[강희맹의 생애와 문학]

사숙재 강희맹은 조선 왕조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6대에 걸쳐 봉사하며 살았던 당대를 대표하는 관료요 학자이며 문장가였다. 그가 안산(安山)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안산 출신 순흥인(順興人) 안숭효(安崇孝)의 딸을 배필로 맞으면서부터였다.

강희맹은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안산 가까운 금양(衿陽)[지금의 경기도 시흥]에 퇴거해 농사일을 연구하기도 하였으며, 60세로 세상을 뜬 뒤 안산 즙천리에 묻혔다. 강희맹은 당신 가문의 자랑스러움을 문집으로 남겨 놓았는데 『진산세고(晉山世稿)』가 그것이다. 『진산세고』는 강희맹의 할아버지 강회백(姜淮伯)[1357~1402]과 아버지 강석덕(姜碩德)[1395~1459], 그리고 형 강희안(姜希顔)[1419~1464]의 시문을 모은 것이다.

[장유의 생애와 문학]

장유는 조선 중기 안산에 은거하였던 학자이자 문신이다. 선조 말에서부터 광해군인조 때까지 살았던 장유는 정치인 또는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다난했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동서 붕당의 정치적 혼란과 내란 그리고 예론(禮論)으로 인한 정치적 대결,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등 끊임없이 벌어졌던 안팎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장유였다.

장유는 당대의 중심적인 정치인이었지만 또한 동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이기도 하였다. 흔히 그를 신흠(申欽)[1566~1628]·이정구(李廷龜)[1564~1635]·이식(李植)[1584~1647]과 더불어 조선조 한문4대가라 하는데, 전아(典雅)하면서도 순창(順暢)한 문장을 쓴 것으로 이름이 높다. 장유가 보인 저술 활동으로는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등이 있다.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

정제두는 1649년(인조 27) 서울에서 포은 정몽주의 11세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균진사였던 정상징(鄭尙徵)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증조부는 승문원박사 정근(鄭謹),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외조부가 호조판서였음을 볼 때, 정제두의 집안은 당대의 손꼽히는 명문임을 알 수 있다. 정제두는 경기도 안산에서 주로 생활하다가 1709년 경기도 강화의 하곡으로 이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60대 후반 이후 정제두가 보인 저술 활동으로는 『심경집의(心經集義)』[1712], 「정문유훈(程門遺訓)」[1715], 『정성서주(定性書註)』[1715], 「단의빈복제의(端懿嬪服制議)」[1719], 『중용설(中庸說)』[1721], 『경학집요(經學集要)』[1722], 『천원설(天元說)』[1731], 『진강책자문(進講冊子問)』[1732] 등이 있다. 정제두의 시문집으로는 1856년(철종 7) 현손 정문승(鄭文昇)이 편찬한 『하곡집(霞谷集)』이 있다.

[성호 이익과 실학]

이익은 1681년(숙종 8)에 태어나 1763년(영조 39) 83세로 세상을 떠난 학자이다. 그는 경기도 안산 첨성촌(瞻星村)에서 살았는데, 그래서인지 스스로 별호를 성호라고 하였다. 1705년(숙종 31)에 증광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당쟁으로 형 이잠(李潛)이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한평생 학문에 정진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이익은 일생을 안산 첨성촌에서 기거하며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중조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학문은 안정복·이가환·이중환 등의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이익은 천문·지리·의학·재정·지방제도·과거제도·학제·병제·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담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하여 『곽우록(藿憂綠)』·『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 등을 남겼다.

[순암 안정복의 사학]

순암 안정복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35세 때에 안산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성호 이익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면서 뒤늦게 성호의 문인이 되었다. 안정복이 편찬한 『동사강목(東史綱目)』은 후대 학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아 끊임없이 연구 대상이 되어 왔기에 오히려 그는 역사학자로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전해 오는 문헌 기록에 따르면, 안정복은 생전에 역사 연구에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관련된 저서도 많이 남겼다. 『동사강목』을 비롯해 『동사보궐(東史補闕)』, 『열조통기(列朝通紀)』, 『사감(史鑑)』과 같은 순수 역사서를 비롯해 『광주지(廣州志)』, 『대록지(大麓誌)』 같은 지리지가 그것이다.

[표암 강세황의 예술과 문학]

강세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이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서울을 떠나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주하여 처음 벼슬길에 오르는 61세까지 30여 년 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강세황은 문인 사대부로서 그림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에도 능하여 이른바 시·서·화의 삼절로서 명성이 높았다.

타고난 예술적 재능 못지않게 탐구 정신 또한 투철해 유년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강세황에 관한 자료는 작품 및 문헌 기록 등이 비교적 풍부하다.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豹庵遺稿)』가 전해지고 있고, 특히 54세 때 꼼꼼히 자화상을 첨부한 자전(自傳)인 「표옹자지(豹翁自誌)」를 서술하여 남겼다.

[한산이씨의 『고행록』]

안산에 거주하였던, 진주유씨 제18세손 유명천(柳命天)[1633~1705]의 삼취 정경부인 한산이씨[1659~1727]의 한글 수필본이다. 내용은 이씨 부인이 시집온 1676년부터 별세한 1727년까지 50여 년간 남편인 유명천의 여러 차례의 유배 생활과 겹치는 집안의 우환으로 인한 생활의 괴로움을 유려한 궁체로 기록한 수필이다. 이 『고행록』은 현재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수려한 문체로 조선 중기 수필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한글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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