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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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道振 |
영어공식명칭 | Nam Dojin |
이칭/별칭 | 중옥(仲玉),농환재(弄丸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근하 |
출생 시기/일시 | 1674년 - 남도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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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97년 - 남도진 『유산록』 저술 |
활동 시기/일시 | 1716년 - 남도진 『계몽차기』 저술 |
활동 시기/일시 | 1718년 - 남도진 『예서차기』 저술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남도진 『주역차기』 저술 |
활동 시기/일시 | 1727년 - 남도진 『고람역』 저술 |
활동 시기/일시 | 1729년 - 남도진 목인임휼계 조직 |
몰년 시기/일시 | 1735년 - 남도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4년 - 남도진 경현단에 배향 |
거주|이주지 | 남도진 은거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
사당|배향지 | 경현단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산70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의령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경현단에 배향된 조선 후기 학자.
[가계]
남도진(南道振)[1674~1735]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농환재(弄丸齋)이다. 아버지는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역임한 남택하(南宅夏)이고, 부인은 기계 유씨(杞溪 兪氏) 유덕기(兪德基)의 딸이다.
[활동 사항]
남도진은 1674년(현종 15)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벼슬을 싫어해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성리학과 역학 연구에 전념하였고, 예학 저술에도 힘썼다. 또한 안진경(顔眞卿)과 유종원(柳宗元)의 서법을 공부하였다. 1697년(숙종 23)에 아버지 남택하가 고성군수로 부임하자, 남도진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과 기행 가사인 「봉래가(蓬萊歌)」를 지었다. 다만 「봉래가」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16년(숙종 42)에는 『계몽차기(啓蒙箚記)』를 지었고, 1718년(숙종 44)에는 부친상으로 시묘살이를 하며 『예서차기(禮書箚記)』 21권을 편찬하였다.
1725년(영조 1)에는 『주역차기(周易箚記)』를 지었고, 학행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건축과 영선을 담당하는 기구의 임시 감독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계속 학문 연구에 힘써 1727년(영조 3)에는 역학 입문서인 『고람역(考覽易)』을 지었다. 1728년(영조 4)에는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에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으며, 학문에 집중하여 『경서차기(經書箚記)』를 지었다. 1729년(영조 5)에는 마을 사람과 종족 간의 상호 부조와 구휼을 목적으로 한 ‘목인임휼계(睦婣任恤契)’를 조직하였다.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는 와중에 우집경(禹執卿)에게서 거문고 연주를 배우기도 하였고, 용문산(龍門山) 아래에 은거하며 시조와 가사를 짓고 자연을 감상하였다. 남도진의 국문 작품으로 『농환재가사집』에 실린 가사 「낙은별곡(樂隱別曲)」과 단가 3수가 전하는데, 「낙은별곡」은 은일거사(隱逸居士)[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 속에서 사는 문인을 이르는 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학문과 저술]
남도진은 평생을 저술에 힘써 『농환재집(弄丸齋集)』, 『주역차기(周易箚記)』, 『고람역(考覽易)』, 『예서차기(禮書箚記)』, 『경서차기(經書箚記)』, 『우공산천고(禹貢山川考)』, 『상제식(喪祭式)』, 『팔면십계(八勉十戒)』, 『낙은별곡(樂隱別曲)』 등을 남겼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의 농환재(弄丸齋) 사당에 영정과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남도진은 1974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에 있는 경현단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