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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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의미역 |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서정석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분포하고 있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흙이나 돌로 축조한 방어시설.
[개설]
성곽(城郭)이란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羅城)을 ‘곽’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곽의 안쪽에 또 다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독립된 공간을 ‘성’이라고 한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이라는 말이 성곽[口]을 창[戈]으로 지키고 있는 형상을 본뜻 데서 알 수 있듯이, 성곽은 국가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가가 성장하면서 영토를 넓히게 되면, 넓어진 영토를 지키기 위해 변경에 축조하는 것 또한 성곽이다. 백제의 성곽은 크게 도성과 산성으로 나뉜다. 여기서는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의 백제 성곽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의 도성]
도성은 말 그대로 왕도(王都)를 에워싼 성곽을 말한다. 즉, 도시 전체를 에워싼 나성이 곧 도성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도성 안에는 왕, 귀족, 일반 서민들의 거주 공간이 있고, 도시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시장, 관공서, 공공건물, 사찰 등이 함께 자리한다. 도성 안에는 왕궁을 에워싼 또 다른 내성이 있다. 이러한 내성을 왕성(王城)이라고 한다. 결국, 도성이란 나성과 왕성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웅진 지역에는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웅진도성이라는 말보다는 웅진은 그냥 왕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기록에도 웅진도성이라는 말은 없다.
왕도 웅진은 공주 공산성(公山城)을 중심으로 그 남쪽에 대부분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대통사(大通寺)는 당시 왕도 내에 자리하고 있던 대표적인 사찰이었으며, 주변 야산에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宋山里 古墳群)을 비롯한 당시의 많은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웅진시대 백제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주 공산성 밖에 있었다는 주장과 공주 공산성 안에 있었다는 주장이 맞서 있다. 당시 왕성에 대한 기록과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를 종합해볼 때 공주 공산성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도 공주 공산성 밖에 있었다고 보았을 때 가장 유력한 후보지였던 공주 공산성 남록에 대한 조사 결과 별다른 시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동성왕 때 왕궁 동쪽에 세웠다는 임류각(臨流閣)의 옛터가 공주 공산성 안에서 발견된 것도 당시의 왕궁이 공산성 안에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다. 이 뿐만 아니라 공산성의 크기가 사비시대 때 왕성의 크기와 동일한 것도 웅진시대에 공주 공산성이 왕성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유력한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
사비시대 백제 왕궁의 위치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한 때 부소산 남록의 관북리 일대가 왕궁의 유력한 후보지 중의 하나로 꼽혀왔으나, 발굴 조사 결과 당시의 도로 유적을 찾아내기는 했으나 왕궁과 관련된 흔적은 전혀 찾지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 왕궁으로 부소산성(扶蘇山城)이 주목된다.
부소산성은 공주 공산성과 마찬가지로 부여 시가지의 북쪽, 금강의 남안에 자리하고 있다. 산의 높이도 해발 110m 내외로 공주 공산성과 매우 흡사하다. 더구나 중국의 『한원(翰苑)』에는 사비시대 백제 왕성의 크기가 ‘방일리반(方一里半)’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러한 크기는 정확하게 부소산성의 둘레와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왕궁은 부소산성을 포함한 부여 읍내 최북단에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사비에는 최북단에 자리하고 있던 왕궁을 중심으로 도읍지를 에워싸는 나성이 축조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다시 5부(部)와 5항(巷)으로 나뉜 정비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와 아울러 도성 내에는 많은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5부와 5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편제되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만 분분할 뿐 뚜렷한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의 산성]
백제 산성에 대한 이해는 아직까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도성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있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나, 산성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미비하여 연구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웅진시대의 산성과 사비시대의 산성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웅진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은 공주 주변에 분포한다. 공주 지역에는 약 20개소의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 산성들 중 대부분이 웅진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산성들이 공주 공산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으로 배치되어 있어 공주 공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산성들은 한결같이 해발 150m 내외의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체 성벽의 둘레도 500m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대부분이 석성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러한 점이 곧 웅진시대 백제 산성의 특징이다.
사비시대가 되면 웅진시대에 나타난 이러한 모습이 크게 변모한다. 사비시대의 대표적인 백제 산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방성(方城)들은 한결같이 험산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방성의 크기가 700~1,650m 범위에 있어 공주 지역의 산성보다 규모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사비시대가 되면서 성돌의 면석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 시초는 백제 가림성(加林城)으로 비정되는 성흥산성(聖興山城)이 아닐까 한다. 성흥산성의 성벽은 전체가 다듬은 성돌로 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성흥산성이 해발 250m의 험산에 자리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는 나지막한 산봉(山峰)에 자리하고 있는 공주 지역의 백제 산성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사비시대 백제 산성의 특징이 된다.
이와 같이 웅진시대에서 사비시대로 가면서 산성의 입지가 험산으로 바뀌고, 성벽의 크기도 점점 더 대형화되었다. 이와 아울러 장방형으로 다듬은 성돌만을 축성에 사용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