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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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藝術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종안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영화·사진·판소리 등의 분야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활동, 또는 그 작품.
[개설]
문화·예술은 한 집단이 살아온 자연 환경, 역사, 종교, 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자연을 중심으로 한 역사와 종교는 예술의 주제나 형태미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예술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군산시는 산과 바다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문화·예술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예술에는 오페라, 뮤지컬, 고전 음악, 연극, 문학, 영화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근대 이전 군산의 문화·예술]
금강(錦江) 초입에 자리한 군산의 문화·예술·역사는 전국 어느 도시보다 유구하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굴이나 조개를 까먹고 버린 조개더미[패총(貝塚)]가 200여 개[전국 600여 개]가 분포돼 있고, 마한(馬韓)의 지배자·지배층 무덤으로 알려지는 말무덤 밀집도가 가장 높은 것에서 선사 문화가 싹튼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군산 지역 문화·예술 흔적은 고구려·백제·신라가 군웅할거 하던 삼국 시대에 들어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고적은 백제 시대에 창건된 사찰들, 천년 고찰 은적사(隱寂寺)를 비롯해 불주사(佛住寺), 보천사(寶泉寺), 상주사(上柱寺) 등에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은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군산시의 조촌동·신관동·내흥동, 성산면의 여방리·도암리·창오리, 옥구읍의 옥정리, 나포면의 장상리, 대야면의 산월리, 옥산면 당북리, 서수면 관원리 등에서 백제 고분이 조사되었고, 성산면 여방리에서 은제 팔찌와 순금제 화판 장식, 군산시 조촌동에서 금동제 귀고리, 대야면 산월리에서 여섯 점의 환두 대도와 말뼈가 출토되어 삼국 시대 군산 지역의 문화가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고려 시대에 비로소 ‘군산’이 들어가는 지명이 등장한다. 1123년(인종 원년) 6월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 한 달간 머물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선화 봉사 고려 도경』에 군산도(群山島)[현재의 선유도]를 방문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선유도 망주봉 주변에는 숭산 행궁을 비롯해 군산정, 오룡묘[제단]와 자복사[불교 사원], 관아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교가 유교(儒敎)였던 조선은 건국 후 국가 시책으로 전국 각지에 향교와 서원을 설치한다. 군산 지역에는 1403년(태종 3)에 두 개[지금의 옥구, 임피]의 향교가 세워지고, 1685년(숙종 11) 이후 여섯 개[염의, 옥산, 문창, 산앙, 치동, 봉암] 서원이 설립된다. 오늘날의 국립 학교와 사립 학교에 해당하는 향교와 서원에서는 충효 정신과 높은 인격을 갖춘 선비를 배출하였다.
예로부터 군산 지역에는 바다와 갯벌이 삶의 터전인 뱃사람이 많이 살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영원한 종교라 일컫는 민속 신앙[巫敎]도 어느 지역보다 성하였다.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무가(巫歌)로는, 무사고와 풍어를 비는 ‘용왕 풀이’를 비롯해 ‘장자(長者) 풀이’, ‘칠성 풀이’, ‘성주 풀이’, ‘조상 풀이’, ‘사자 풀이’, ‘삼신 제왕 풀이’, ‘당산제 풀이’ 등이 꼽힌다.
[일제강점기 언론에 비친 군산의 문화·예술]
세곡을 보관하는 군산창을 보호하기 위해 군산진이 설치되어 경제적·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됐던 군산은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조계지[개항 도시에 있었던 외국인의 거주 지역]를 설치하고, 개항장을 관리하는 옥구 감리서(沃溝監理署)를 두었다. 그러나 대한 제국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에 종속된다. 그럼에도 군산 지역의 문화·예술은 면면히 이어지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일제가 우리 전통 문화를 말살하고 일본 문화를 강요했음에도 군산시 조촌동 출신 정만채(鄭萬采)[호는 매촌(梅村), 1884~1961]는 유학하는 선비들을 모아 한시(漢詩)를 지으며 문학 운동을 펼친다. 정만채는 군산 시사회(群山詩社會)를 조직하여 1950년대 후반까지 활동하였다. 정만채가 남긴 한시 130여 수는 최근 『매촌 한시초(梅村漢詩抄)』로 엮어지기도 했다.
또한, 조선인의 생활 전반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일제의 무단 통치 속에서도 전북 최초로 극장이 세워진다. 1914년 조선 총독부 철도국이 펴낸 『호남선』에는 “군산에는 군산좌와 명치좌 두 곳의 극장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21년 영화 전문 상영관 희소관이 문을 열었고, 당시 군산좌는 민족 운동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과 강연회 등이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목할 것은 1921년 전국 최초로 군산에서 동광단(東光團)이라는 신파 극단이 창단됐다는 것이다. 단장 김춘교[22세], 부단장 심화경[21세], 간사 김춘자[16세] 등 군산 출신의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동광단은 서울·인천·대전·평양·해주 등지에서 공연했는데,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들은 공연 수익금을 고학생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해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당시 언론은 동광단 단원들을 상당한 학식과 신사상을 흡수한 여성들이라고 평했다.
특히, 서양 선교사 전킨(W. M. Junkin)[한국명 전위렴]이 1899년 설립한 구암 교회[궁멀 교회]의 남녀 찬양대[합창단]와 구암 양악대[밴드부], 군산 기독 청년회 등이 개최하고 후원하는 음악 대회가 주악, 독창, 기타, 하모니카, 피아노, 가극 등의 부문별로 공회당, 희소관, 군산좌, 개복동 예배당[개복 교회] 등에서 열렸다. 음악 대회는 군산 지역 서양 음악회 및 연극의 효시가 된다[1926년 6월 14일 공회당 공연 입장료는 일등석 70전, 이등석 50전].
공연 문화와 더불어 주막(酒幕)이나 장터에서 사 먹던 술과 밥, 즉 외식 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주막이 차츰 사라지고, 음식점 간판이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정(榮町) 입구[예전의 가구 골목]에 자리한 강경옥[냉면 전문]과 구복동[현재 중앙로 2가]에 있던 평양관[한식당]은 1920~1930년대 호황을 누린 식당이었으며, 일본인들도 이용했다고 한다. 권번 출신 기생들이 손님을 맞았던 고급 요릿집 명월관(明月館)은 우리 소리[국악]의 맥을 이어주는 역할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프랑스식 카페가 등장하였으며 중앙지 신문사 지국들이 주최하는 서양 요리 강습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요리 강습회 참석자는 대부분 가정 주부였으며, 카페는 명치정(明治町)[현재 중앙로 1가]과 명산동 유곽 근처에 몇 곳이 있었다. 실내에는 샹송이 흐르고, 맥주와 커피, 샌드위치와 오므라이스 등을 팔았으며 세련된 마담이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황해도 개성(開城) 출신으로, 1924년 군산에 내려온 우석 황종하, 우청 황성하, 청몽 황경하, 이산 황용하 사형제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화가들이었다. 사형제는 개복동에 서화 미술 연구소를 개설하고 1925~1927년 공회당에서 황씨 사형제 서화 전람회를 가졌다. 1930년 12월에는 동아 일보 후원으로 서울 시내 횡전정 서본 원사[현재 대학로 삼성 빌딩 자리]에서 황씨 사형제 전람회를 개최했다. 회비 3원을 받았음에도 성황을 이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4년 4월 1일자 동아 일보는 군산에서 태어난 김훈(金薰)의 사진을 게재하며 “조선이 낳은 세계적인 테너 가수”, “우리 악단(樂壇)의 혜성(彗星)”, “천재적인 음악가” 등으로 소개하면서 일본과 한국에서 후원회가 조직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신문은 김훈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상해(上海) 첫 공연에서 선풍을 일으켰으며, 3년 동안 남아메리카와 서반아[스페인] 순회 공연을 계약했다는 소식도 전한다.
1937년에는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출신의 백릉(白菱) 채만식(蔡萬植)이 풍자와 해학으로 일제 강점기 혼탁한 사회상을 풍자와 해학으로 예리하게 파헤치는 장편 소설 『탁류』를 발표한다. 채만식은 1937년 10월 12일~1938년 5월 1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96년 서울 대학교가 선정한 동·서양 고전 현대 우수작 200편에 뽑히면서 군산을 ‘탁류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1941년 5월 태평 레코드사 주최 전국 가요 콩쿠르에서 군산 출신 남춘역[본명 이종모]이 1등을 차지했다. 남춘역은 일본으로 건너가 데뷔곡을 녹음하고 가수가 된다. 해방 후 영화 배우로 변신, 단역과 조연으로 300여 편에 출연하는 등 연기에 몰두하다 1963년 8월, 4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장례식은 배우 협회장으로 치러졌고, 사후에 열린 각종 영화제에서 특별 연기상, 특별상 등을 수상하며 ‘이름 없는 명배우’로 평가받았다.
[해방 이후 군산의 문화·예술]
1948년 ‘군산 국악원’이 설립되고, 전쟁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1952년 11월 ‘군산 아마추어 사우회’, 1953년 2월 ‘토요 동인회’가 결성된다. 토요 동인회 창작 활동이 널리 알려지면서 신석정, 이동주 등 전주와 익산의 문인들도 가세하여 전북 문학의 메카로 거듭난다. 다른 문화·예술 분야의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1962년 한국 사진 작가 협회 군산 지부, 1963년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군산 지부[약칭 군산 예총]가 발족한다.
1965년 10월 옥구 문화원이 설립, 사단 법인 인가를 받는다. 20년 후인 1986년 7월에는 군산 문화원이 사단 법인 인가를 받아 설립된다. 군산 역사 기행, 용왕굿 재현, 『군산 문화』 발간 등 전통 문화 보존과 지역 특성을 살리는 사업에 주력하던 두 단체는 1995년 행정 구역 통합으로 1995년 1월 1일 군산 문화원[초대 원장 이병훈]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오늘에 이른다.
1963년 4월 한국 예총 군산 지부[초대 지부장 이병훈]가 창립되고, 1970년부터 한국 예총 군산 지부 산하 8개 예술 단체[국악 협회·문인 협회·무용 협회·미술 협회·음악 협회·사진 협회·연극 협회·연예 협회]가 참여하는 ‘진포 예술제’를 해마다 개최해오고 있다.